디지털 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는 너무나 강렬하다. 좀 비유적으로 말하면 아이들의 오감을 꼼짝 못하게 사로잡아버린다고 봐도 좋겠다. 여기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어릴수록 디지털 기기에서 나오는 다량의 이미지 기호 요소들은 아이들의 인지구조를 완전히 장악해 버려 일상생활의 평범한 사물 이미지들에는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한 아이들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 강력한 자극에 길들여진 아이는 섬세하고 미세한 수많은 존재들이 내는 소리와 색의 떨림들을 이해하고, 감각이 같이 반응하며 공명하기가 쉽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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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타까운 일은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들에게 부모들이 시도 때도 없이 디지털 영상물을 보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너무 일찍 디지털 이미지의 세례를 받을 때 생기는 인지구조의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 p.20
엄마의 일방적인 헌신은 아이가 주체가 되는 걸 방해한다. 보통 가족주의 안에 갇힌 부모들이 이걸 망각한다. 아이에게 엄마는 애착과 분리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이중의 대상이다. 그야말로 사랑과 애착의 대상이면서, 영원히 저 엄마에게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공포와 불안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 p.54
아이는 이때 진퇴양난에 빠진다. 엄마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메타메시지를 통해서 느꼈는데 자꾸만 널 사랑한다고 강요하듯 다가오니 이걸 내칠 수도 없고 고민하다가, 그래도 엄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엄마의 가장된 감정을 받아들여 준다. 이런 강요된 관계가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아이는 아주 심각한 한 가지 상황에 빠지게 된다. 만약에 아이가 ‘엄마는 지금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하고 위장된 감정의 영역을 건드린다면 엄마는 금방 아이에게 벌을 주거나, 다른 이유를 대서 ‘그건 니가 착각하는 거야. 너는 지금 잘못 판단하고 있어.’ 하면서 아이를 회유할 것이다.
--- p.78
자아가 생기기 이전 엄마와 완전히 한 몸이었을 때 가졌던 상상의 공간에서 아직 완전히 분리되어 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아이는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다. 그런데 문화적인 심층에서 아이는 엄마에게 절대적인 반기를 들고 있다. 모성 이데올로기의 기반이 되는 가족(가정)이란 개념은 근대에 태어난 산물이다. 1990년대 우리 아동문학 판에도 중산층 개념이 작동하면서 가족주의 개념이 더욱 강화되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가족의 개념은 학벌주의를 내세운 근대교육과 합쳐지면서 더욱 폐쇄적인 공간, 은밀하면서도 사적인 공간으로 변화되었다. 가정(가족)이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엄마는 쓰러져서는 안 되는, 절대적으로 자기 관리를 잘 해 내는 모범이 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아이 또한 관리해 내야 하는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학벌주의 시스템 속으로 아이를 편입시키기 위해, 엄마가 먼저자기 욕망은 숨기거나 아니면 스스로 거세한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엄마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보호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을 통제하고, 아이의 욕망을 거세하는 논리를 강요하는 가부장의 언어까지도 사용해야 하는 이중 삼중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한다. 물론 예외도 없지 않겠지만 이런 모습이 보편적인 한국 엄마들의 상황이 아닐까 싶다.
--- p.106
『내 친구 윈딕시』에서 엄마는 아이(오팔)를 버리고 떠났다. 어찌 보면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더 중요시하여 오팔에게 엄마를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엄마는 아이를 남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오팔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의 아이가 되었다. 많은 작가들이나 어머니 독자들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떠난 것에 대한 도덕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차적인 감정이 작동하여 작가들은 부모가 없는 고립된 아이의 삶을 그려갈 때, 동정과 연민의 언어가 주를 이루는 문장을 쓴다.존재를 보는 관점이 도덕적인 판단에 먼저 가 있는 것이다. 부모가 떠난 아이는 불쌍하다는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아이를 보기 때문에, 그 문장이 당연히 우울하면서 교훈적이고 계몽적인수준을 넘어서기 힘든 것이다. 한 존재를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히 오만한 자세가 아닐까? 동정과 연민의 언어를긍 정적으로만 보는 시각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가들은 동정의 코스프레를 한다. 진정성과 동정의 코스프레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동정의 코스프레는 어떤 타자와의 간극을 급격하게 줄이고 싶은 대단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의도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 p.128
못한 존재였다. 그래서 이들 온코마우스나 여성인간은 구원의 역사를 모르기에, 구원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사이보그 종의 실제물들인 것이다. 남성 중심의 지배질서를 전복하려는 여성들은 기존 구원의 역사에서 벗어나 있을 수밖에 없다. 온코마우스와 여성인간은 “자연적 주체를 오염시키는 감염매체들”(『겸손한 목격자』, 249쪽)이라고도 말한다.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는 자연의 신성함이 있었다. 생명의 신성함이 있었다. “인종의 순수성, 모든 종류의 순수성, 진실로 토착적인 유럽을 위한 태양 중심적 계몽이라는 거대한 백색 희망, 인간이 스스로 탄생했다는 꿈, 하나의 선(善)을 위해 자연스러운 타자들을 궁극적으로 통제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위 책. 250쪽) ‘잡종 생쥐’인 온코마우스와 ‘인간답지 못한 픽션의 인간’인 여성인간에 의해깨져 버린 것이다. 이들은 모든 걸 뒤섞어 잡종(hybrid)을 만들어놓았다. 순수 자연적 주체가 구분해 놓았던 종의 경계를 다 넘어 버렸다. 분류학적 계를 다 넘어 버리고, 남성 중심의 가계 또한 오염시켜 버렸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 바로 SF이고, 이 세계에서 누가 시민일 수 있고 누가 중개행위자일 수 있는지를 다루는 담론이 바로 SF가 추구하는 세계의 주제이다. 온코마우스와 여성인간은 근대 이후 사이보그 세계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상징적인 새로운 세계의 주인공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권정생이 생애 마지막 유작으로 남긴 SF 작품인 『랑랑별 때때롱』을 한번 같이 읽어 보자.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권정생 문학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 사람의 작가는 세상을 떠나면 인류 문화의 유산으로 남는다. 우리는 이 문화유산을 귀하게 여기고 어떻게든지 즐기면서, 오늘의 스토리텔링을 위한 재료와 땔감으로 자꾸 갖다 써야 한다. 그래서 한 사람의 작가는 그다음 세대 작가들에게 기꺼이 먹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는 권정생을 불러내서, 권정생이 남긴 작품들, 말들, 삶의 흔적들을 또 다른 다양한 것들과 묶어서 거기에서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때 나오는 스토리텔링은 꼭 권정생이란 한 작가를 우상으로 만들어 내는 그런 언어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해러웨이가 앞서 말했듯이, 존재를 보는 변할 수 없는 관점인, 양립할 수 없는 모두가 참된 존재들이라 보고, 그 양쪽을 다 인정할 때의 팽팽한 긴장감을 견뎌 내면서 다양한 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양자의 존재가 모두 본래의 내면 깊은 의미와 울림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 pp.162~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