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의 첫 장을 넘길 때가 생각난다. 당시 나는 심한 기침과 고열로 병원에 누워 있었다. 식욕도, 의욕도, 아무런 감정도 없이 팔에 꽂힌 주삿바늘 하나에 의지한 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었고, 책 첫 장을 펴고 서문을 읽어 가던 순간 옮긴이의 마지막 말에 갑자기 심장이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신에게 드릴 테니 부디 기쁘게만 살아라.”
--- p.18, 「프롤로그」 중에서
“공부를 하기 전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취직’과 ‘돈의 증식’이라는 생각이었다. 넓은 아파트, 결혼, 육아, 노후보장 등등.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매뉴얼을 실행하려면 무조건(!) 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이 많으면 삶을 더욱 윤택하게 살 수 있을 것이고, 남들과는 삶의 질이 분명하게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들면 들수록 나와는 다른 삶이 보이지 않았다. 내 삶은 당연히 급이 높은 것이고, 나와 다른 삶은 낮은 수준의 것으로 취급하는 수목의 욕망이 내 안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다양한 삶의 가치와 차이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나의 생각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알게 되었다”
--- p.31, 「‘리좀과 글쓰기’」 중에서
“카페 가고, 영화 보고, 쇼핑하고…. 연애가 처음인 그녀와도 초반에는 보편적인 연애 코스를 밟아 갔다. 특히 직장을 다니는 우리에게 주말은 형식적으로라도 꼭 만나야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사실 주말을 ‘빡세게’(?) 공부하는 나로서는 다소 제약이 많았다. 공부하는 시간을 그녀에게 내줄 수 없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린 나머지 그제서야 내가 하는 공부에 대해 털어놓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공부를 하고 있어요.” 자격증 공부인 줄만 알았던 그녀는 놀라기도 하면서 내가 하는 공부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천 개의 고원』을 시작으로 내가 읽었던 여러 책을 가지고 그녀와 세미나를 시작했다. 카페, 지하철, 영화관 등, 책을 펴고 세미나를 할 때면 우리가 앉아 있는 공간은 ‘공부방’, ‘세미나실’로 순간적인 비-물체적 변형을 이루었다. 둘 사이에는 연인관계에서 동학(同學)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배치가 생겼고, 새롭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린 것이다”
--- p.51~52, 「‘언어의 전제와 연애’」 중에서
“정신없이 밥을 먹을 때, 내 눈이 향한 곳은 웃기게도 유튜브에 나오는 다이어트 영상이다. TV 속 아이돌의 잘 빠진 몸매를 보라. 길쭉한 키에, 날씬한 허리! 거기다 배에 뚜렷하게 새겨진 ‘왕’(王)자 복근이 나의 욕망을 자극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키도 작고 허벅지와 허리는 왜 이리 두꺼운지…. 거기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를 보면 깊은 한숨이 나온다. “올해는 꼭 살을 빼고 말 거야!” 매년 1월 1일이면 다이어트의 다짐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지방 흡입 빼고 안 해본 다이어트가 없다. 헬스는 기본이고, PT, 복싱, 각종 스포츠 등. 동호회까지 가입하며 미친 듯이 운동을 했다. 그뿐이랴. 살이 빠진다는 식이요법도 해봤다. 닭 가슴살은 필수이고 몸의 독소를 빼주는 디톡스까지! 간헐적 단식과 심지어 한방 다이어트까지 시도했었다.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아이돌의 몸매를 갖기 위해서!”
--- p.67~68, 「‘기관 없는 몸체와 다이어트’」 중에서
“내 여행의 목적은 루쉰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보고 중국의 넓은 대륙을 몸소 느껴 보고 오는 것이었다. 이 단순하고 소박한 원칙을 망각한 채 내 발걸음은 맛집과 관광지로 향했다. 뿐만 아니라 루쉰박물관에 가서도 내 머릿속은 온통 선물뿐이었다. ‘회사 동료들에게 어떤 선물을 사가지?’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내 발도 자연스럽게 백화점으로 향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루쉰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 멈춰 있었다. 유목과 여행의 핵심은 일단 ‘걷기’다. 발이 멈추는 순간 유목도 여행도 끝이다.”
--- p.129~130, 「‘전쟁기계와 여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