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집은 주요 고객층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인정다사(人情茶肆)’는 음악을 감상하거나 공연을 즐기러 오는 손님들이 많은 곳이었고, ‘시두(市頭)’는 다양한 업종의 상인들이 모여 교류하고 거래하는 곳이었다. 거래가 성사되지 않더라도 차를 함께 마시는 벗이 되어 서로 얼굴 붉히지 않으니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화다방(花茶房)’은 이름만 찻집이었지 사실은 기생이 있는 유흥 업소였기 때문에 호색한들이 애용했다. 당시 임안(臨安)에 ‘왕(王)씨 엄마 찻집’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의 설화꾼이 들려주는 ‘서산일굴귀(西山一窟鬼)’에 대한 이야기가 손님들에 게 큰 인기를 끌어 ‘일굴귀 찻집’이라 불리기도 했다.
--- p.47, 「찻집엔 특별한 것이 있소」 중에서
송나라 씨름의 가장 큰 특징은 여자 씨름이었다. 여좌(女?) 또는 시박 (?撲)이라고도 불린 여자 씨름은 남자들의 씨름 경기가 열리기 전 분위기를 띄우는 식전 행사로 열렸다. 여자 씨름으로 구경꾼이 모여들고 열기가 점점 오르면 정식으로 남자 씨름 경기가 시작되고 여자들은 퇴장 했다. 남자 씨름과 마찬가지로 여자 씨름도 선수들이 목과 어깨, 등을 드러낸 채 경기를 했다. 당시에는 이 정도 노출도 파격이었기 때문에 여자 씨름을 ‘벌거벗은 여자들의 공연’이라는 뜻으로 ‘부인나희(婦人裸戱)’라 불렀다.
--- p.67, 「여자들이 씨름을 한다네」 중에서
소동파, 〈우구(牛口)에서 달을 보며〉
문득 병신년을 회상하니
도성에 큰비 퍼붓던 일이 생각나네.
한밤중에 채하(蔡河)의 제방이 터지고
도성 남쪽에 사납게 물이 차올랐지.
수레와 말이 다시 보이지 않고
뗏목꾼만 쉴 새 없이 다녔네.
어느덧 가을이 되어 날이 갰건만
아홉 갈래 도성 길에는 물이 넘쳤네.
용진(龍津)에서 야시장을 바라보면
여전히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지.
--- p.79, 「야시장 등불은 여전히 반짝이겠지」 중에서
송나라 사람들은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여자들은 자신도 항아(嫦娥, 중국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처럼 희고 고운 얼굴을 갖게 해달라고 빌고, 남자들은 하루빨리 과거에 급제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남쪽 지방에서는 물에 등불을 띄워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 보름달을 구경할 때 음식도 빼놓을 수 없었다. 중추절이 되면 집집마다 술을 마셨기 때문에 큰 술집에서는 중추절이 되기 전에 술을 새로 빚어놓고 팔았다. 술 외에 석류, 마르멜루(모과와 비슷한 과일), 배, 대추, 밤, 포도, 귤 등 제철 과일도 준비했으며 꽃게도 있었다. 요즘 사람들에게 익숙한 월병(月餠)1은 등장하기 전이라 궁궐에서만 ‘궁병(宮餠)’이라는 것을 만들어 먹었다. 궁병은 ‘소병’ 또는 ‘월단(月團)’이라고도 불렸다.
--- p.106, 「달구경하며 먹고 마시네」 중에서
중국 최초의 법의학서인 《세원집록(洗寃集錄)》에는 시신에 나타나는 현상, 현장검증, 치명상 감별, 해부 등 각종 법의학 지식이 상세한 사례와 함께 기록돼 있다. 그중 골격 손상을 검사하는 ‘홍산험골법(紅傘驗骨法)’은 땅에 구덩이를 파놓고 깨끗이 씻은 시신의 뼈를 넣은 뒤, 구덩이 주위에 불을 피운 다음, 술 두 말과 식초 다섯 말을 뿌리고, 한 시간이 지난 후에 뼈를 꺼내 붉은 우산 아래에서 검사하는 방법이다. 뼈를 햇빛에 비추어 보아 어두운 붉은 색을 띠면 죽기 전에 뼈의 그 부위를 맞았다는 뜻이며, 핏기가 돌면 죽기 전에 뼈가 부러진 것이다. 뼈가 부러졌어도 햇빛에 비추어 보아 핏기가 없으면 사후에 손상된 것이다. 뼈를 술로 소독하고 식초로 깨끗이 닦아낸 다음 붉은 우산으로 햇빛을 투과시켜 자외선으로 뼈를 검사한 것이니, 지금 보아도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방법이다.
--- p.142, 「현장검증 하러 가세」 중에서
《무경총요(武經總要)》에 송의 중장보병(중무장을 한 보병)이 입던 갑옷인 보인갑(步人甲)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보인갑은 철제 비늘을 가죽 끈이나 못으로 연결해 만든 전형적인 비늘 갑옷이었다. (……) 소흥(紹興) 4년(1134년)에 정한 규정에 따르면, 보인갑은 비늘 1825장 을 이어 붙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무게가 29킬로그램에 달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갑옷이었다.
--- p.153, 「비늘 천 개로 지은 갑옷」 중에서
〈서학도(瑞?圖)〉는 그 흔치 않은 작품 중 하나로 휘종이 서른 살 남짓 되었을 때 그린 것이다. 정화(政和) 2년(1112년) 원소절 다음 날 도읍 변량의 하늘에 흰 구름이 뭉게뭉게 모여들더니 학 한 무리가 선덕전 상공을 빙빙 돌며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그중 두 마리가 궁전 지붕 양쪽의 높은 망새(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물) 위에 내려앉았다. 궁궐 사람들이 올려다보며 기이하게 여겼고 길을 가던 백성들도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았다. 휘종도 상서로운 구름과 신선 같은 학이 길조를 알리기 위해 도읍을 찾아온 것이라며 흥분해서는 직접 붓을 잡고 비단 천에 그 광경을 그렸다. 그 그림이 바로 〈서학도〉다.
--- p.197, 「비단 위에 내려앉은 두 마리 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