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면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 제목의 성서적 타당성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 과정이 정당하지 않은 목적 지향성의 그 가공할 위험을 우리는 지난 대통령 탄핵 사건과 그 후속 상황을 지켜보면서 절감하고 있지 않은가? 권력과 이데올로기 수호라는 목적 아래 자행된 권력층의 온갖 불법 편법 탈법 위법의 추악한 몰골들은 촛불시민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 p.9
기독교의 핵심 기치인 ‘Soli Deo Gloria’(오직 신께 영광을!)는 그것에 대한 질문을 모두 철폐하고 과정의 정당성을 묵살해도 되는 절대 담론일 수 없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해야 하는 목표치로 Soli Deo Gloria를 떠받든 결과가 소위 ‘기독교 제국주의’라는 종교 헤게모니다.
--- p.12
신약성서의 대표적인 고발자는 예수와 바울이다. 예수의 일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고발장이다. 그의 탄생은 권력 엘리트(헤롯 왕)와 지식 엘리트(마고스들, 소위 ‘동방박사’)의 욕망과 허상을 고발하고, 광야 시험에서 예수는 유혹자 마귀의 간계를 폭로하여 보기 좋게 물리친다.....평민의 용어로 설파된 하늘나라 비유는 종교를 성역화하고 사유화하는 특권층에 대한 천상의 경고장이다.
--- p.19
대한민국 주류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암울한 시대정신(출세 지향성, 특권 의식, 명문대병, 물신주의)이 혹자들의 지적대로 일제강점기 식민 사관의 잔영이라면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은 전국민적 부고訃告를 알리는 원년이어야만 한다.
--- p.30
나를 옭아매는 모든 힘으로부터의 자유, 곧 홀로서기가 자신을 향한 죽음 선언으로 이뤄진다는 성서의 반전 구원은 자유 잃은 100주년 독립 후손들이 미래의 100년을 향해 낭독해야 할 독립선언서다. 당신은 독립했는가?
--- p.30
지난 2019년 3월 8일 문재인 정부 2기 개각 때 임명된 장관 후보자들과 그 인사 직후 사퇴한 청와대 대변인의 면면은 첫째,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진보 정권이나 그 촛불로 불태워진 보수 정권이나 도긴개긴임을 국민 앞에 증명해 보였고 둘째, 그러므로 독립국 대한민국의 주류사회가 물신物神의 마수에 단단히 붙잡혀 있다는 필자의 진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 p.33
사람들이 종종 ‘A와 B가 다르다’를 ‘A와 B가 틀리다’로 말하는 경우를 볼 때마다 의문이 든다. ‘다름’(difference, 異)은 ‘틀림’(wrongness, 誤)이 아니고 두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분명히 다른데도 사람들은 왜 ‘다름’이란 의미를 ‘틀림’이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일까? 영어는 물론 한자어도 전혀 다른 두 단어 간의 이런 비정상적 어법이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 통용되었는지 궁금하다. --- p.52
차 인터페시아에 짱박혀 있는 100원짜리 동전들이 내 굶주림을 해결해 줄 구원자가 아닌가. 언 듯 여러 개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세어보니 12개. 아쉬운 대로 김밥 한 줄이라도 먹으려고 근처 김밥집을 찾았다. 동전 12개를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김밥집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메뉴판을 봤다. 십여 가지의 다채로운 김밥 리스트의 가격대를 훑는데 이게 웬일인가. 최고가 2천 원에서 출발한 김밥 가격표의 최저점은…… 아뿔싸, 1,300원이었다.
--- p.64
성서는 일관되게 ‘작음’, ‘적음’을 주목한다. 마태복음의 예를 보자.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소자’, 즉 작은 자라 칭하고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마태복음 18:5). 또 공동체 안에서 소외당하는 작은 자의 수호천사가 천부를 항상 뵙는다는 예수의 묵시론적 언설(10절)은 작은 자 홀대에 대한 최고 수위의 경고다. 작은 자를 소외시키고 따돌린 자의 최후가 목에 바위를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범죄한 신체 일부를 잘라내는 것보다 더 참혹하다는 심판론(6~9절)은 ‘큰 것’, ‘많은 것’, ‘높은 것’을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관을 향한 핵폭탄급 선언이 아닐 수 없다.
--- p.67
작은 자들을 업신여기고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회의 폐습을 혁파하는 예수의 언설들은 작은 자들의 수호천사가 천부를 알현한다는 천기누설(10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 p.76
약자들의 수호천사가 심판주와 매일 면대면 만남을 갖는다는 예수의 계시는 삶의 우선 가치가 재정의되어야 할 것을 촉구한다.
--- p.76
좁은 등산로를 가로질러 개미들의 긴 행렬이 이어진다. 무시하고 지나갔다면 대형 참사(?)가 날 뻔했다. 가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문득 영화 〈곡성哭聲〉의 대사가 떠오른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 p.77
그리스도의 높아짐이 유일신 신앙 파괴가 아니라 도리어 유일신이 기뻐할 일이라니 좀 이상하다. 여호와 외의 그 어떤 존재도 믿지 말고 절하지도 말 것을 엄명한 십계명이 폐기되었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 존재, 즉 유일신의 타자他者인 예수를 믿고 섬기고 그 앞에 절하는 것이 신성모독이 아니다?
--- p.83
‘예수 경배’가 왜 유일신 신앙 파괴나 신성모독이 아닌가에 관한 바울 기독론의 테제these가 바로 케노시스다. 빌립보서 2장 9절의 서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는 예수 경배가 신 주도의 프로젝트임을 밝힌다.
--- p.83
당연한 권리 향유조차 복음의 방해가 될 것이 두려워 포기한 사도의 자기 버림 영성이 십자가 걸린 강단에서 자신의 위상과 인기를 거침없이 쏟아 내는 속칭 ‘스타 목사’들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의 ‘자기 사망’ 선언은 그저 옛사람의 흘러간 읊조림에 불과한 것인가?
--- p.120
따라 하지 않는 아이 승범이는 발표회 당일 자신의 무대를 펼쳤다. 특히 의자에 앉아서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무릎을 모으고 바른 자세로 앉아 두 손으로 오카리나를 들고 연주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엉덩이를 의자 끝에 걸친 채 비스듬한 자세에서 한 손으로 오카리나를 잡은 승범이는 그렇게 연주를 끝냈다.
--- p.144
성서는 예수를 ‘독생자獨生子, the only begotten Son’라고 소개한다....‘홀로獨, only’와 ‘나신(또는 사신) 아들生子, begotten Son’의 합성어인 이 표현을 대할 때 의문이 들 수 있다: ‘왜 최생자最生子, the best begotten Son가 아니고 독생자일까?’
--- p.146
신의 설계대로 제작된 신의 거소에 정작 신의 형상은 없었다.
--- p.164
은밀함은 이렇게 인류 최후 심판을 관통한 주제다. 동일시 잠행을 통해 심판 대상자들을 영생행과 영벌행으로 구분하는 심판자는 은밀 캐릭터 소유자다. 영생행을 얻도 받은 양들 역시 은밀 캐릭터가 분명하다. …… 영생과 영벌이 심판 증인들에 대한 행위로 판가름 난다는 점에 주목하는 이들에겐 증인들의 정체가 궁금하다. 이들이 누군지 알면 영생은 떼 놓은 당상 아닌가.
--- p.175~176
노자가 갈파한 하늘의 성근 그물은 누구에게 구원의 망이며 누구에게 멸망의 망일까?
--- p.177
영어 success를 흔히 ‘성공’으로 번역하지만 사실 success의 동사형 succeed는 sub(아래, 하위, 부副, 보補)와 ceed(go, forward)의 합성어로서 ‘하위(또는 보조) 상태에서 가다’란 의미다. 따라서 success는 본래 과정 지향적 단어로서 ‘성공’보다는 ‘성취’에 더 가깝다. 우리가 성공이라는 결과 지향적 단어로 이해해 온 success가 실제론 과정을 함의하는 단어였던 것이다.
--- p.181~182
PA는 억울하다. 여인의 간음죄를 용서하는 장면이나 언급이 PA엔 없다. PA의 서사 어디에서도 간음을 용인하거나 방관하는 윤리적 방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구약의 율례(신명기 22:22~24; 13:9; 17:5~7)에 따라 돌로 치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사람들은 윤리적 이유를 내세워 PA를 정경에서 배제했다. …… PA 사건은 간음죄까지 용서하는 반율법적 은혜를 옹호하는 본문으로 찍혀서(?) 따돌림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PA에서 여인의 간음죄는 용서된 것이 맞나?
--- p.196
구세군 본부를 찾아가 1억 원짜리 수표가 든 봉투 두 장을 건네고 홀연히 사라진 백발의 노부부는 늘그막에 영생을 보장받으려고 황급히 자췰 감춘 것일까?
--- p.227~228
지식엘리트의 메시아 허상과 권력엘리트의 메시아 숙청이 보내오는 마태복음 탄생기사의 어둡고 살벌한 이미지가 현란한 성탄 맞이 세레모니와 어울릴까? 깊은 밤, 고요한 들판에서 목자들에게 은밀히 전해진 누가복음의 여물통 아기 탄생 이야기가 오케스트라 성가대의 화려한 성탄 기념 칸타타 선율에 담겨질 수 있을까? “구유에 나신 왕을 믿는 교회가 부와 재산을 축적하고 있다”는 어느 신학자의 일침은 1세기 ‘구유 성탄’과 21세기 ‘교회 성탄’이 2천 년 시공간을 사이에 두고 연출하는 그 아득한 비대칭을 질타하는 것 같다.
--- p.236
일반인은 물론이고 재벌가나 톱스타 같은 유명인들의 이혼 사유에서 성격 차이가 매년 1위를 차지한다. 이쯤 되면 성격 차이는 대한민국 부부들을 덮치는 쓰나미라 해야 할 것 같다.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면 한류 스타 커플마저 결혼 1년 8개월 만에 무릎을 꿇었을까. 성격 차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손주까지 있는 할머니가 지긋지긋한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어 달라고 판사 앞에서 눈물로 호소했을까.
--- p.252
하지만 남녀 특히 부부 사이에서 매력은 관계를 지탱하는 보루와 같다. 당김이 없는 사람과 같이 살 수 있을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상대와 하루를 한 달을, 아니 1년, 나아가 일생을 함께할 수 있을까? 나와 똑같은 복제 인간 같은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럴 거 같진 않다. 다르니 끌리고 끌리니 지지고 볶으며 30년을 살아올 수 있었다고 자평한다.
--- p.269
목사의 설교에 토 달지 말고 아멘으로 순종하라는 교회의 금과옥조(?)는 순종을 넘어 맹종의 헤게모니를 성직자들에게 부여했다. 그 결과 목사의 설교는 금문禁問의 말씀이 됐고 목사의 뜻은 ‘노no 딴지’의 신의神意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 질문과 문제 제기는 신의 대언자에 대한 불경한 짓거리로 간주됐다. 교회들의 ‘금문 & 노 딴지 전통’은 이렇게 구성원들의 문제 제기를 원천 봉쇄해 버렸고, 온통 예스맨들로 형성된 공동체는 점차 병들어 갔다.
--- p.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