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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라한 해바라기 밭

아스라한 해바라기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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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1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370g | 135*205*15mm
ISBN13 9791188403233
ISBN10 1188403230

카드 뉴스로 보는 책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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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때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 p.9

온종일 벗은 채로 해바라기 밭을 돌아다니느라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엄마의 몸과 만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파리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고, 바닥의 흙은 발바닥을 은근하게 간질였다. 엄마가 해바라기 밭 한가운데를 걷는 모습은 물속에서 둥둥 뜨지 않도록 노력하며 강을 건너는 것처럼 보였다.
--- p.24

이제 막이 열릴 차례였다. 대지는 전에 없던 적막에 둘러싸였다. 엄마는 유일한 관객이었다. 천 한 조각 걸치지 않고 장화 하나만 달랑 신은 엄마는 촉촉하게 젖은 채로 빛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엄마를 보지 못했다. 엄마는 가장 큰 식물이었고, 삽은 소중한 권력의 지팡이였다. 장화를 신은 엄마가 다다르지 못할 곳은 없었다. 엄마는 여왕처럼 자유롭고 당당했다.
--- p.26

나는 떠나보내는 것을 잘하고, 엄마는 찾아오는 것을 잘한다. 엄마는 늘 궂은 날씨에 엄청난 짐을 챙겨 들고 나를 찾아왔다. 눈을 헤치고 온 엄마의 등에는 큰 가방이, 양 어깨에는 큼지막한 보따리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보따리에 납치된 사람 같았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다른 데 신경 쓸 새도 없다는 듯 보따리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어서 나머지 짐을 마저 가지고 오자고 성화를 부렸다. 엄마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현관문 밖에 엄마가 들고 온 것의 배가 넘는 짐이 있었다.
--- p.34

버스가 멈춰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몇 번이나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간절하게 엄마가 있는 창 아래로 달려가서 까치발을 딛고 차창을 두드려 엄마와 다시 한번 이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하지 않았다.
--- p.39

나는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온종일 할머니가 살아가는 세월의 언저리를 배회했다. 이상한 건 그 세월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독한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누에고치의 일
생 같았다. 나는 누에고치처럼 자기 안에 침잠하던 할머니의 삶에 개입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알 수 없는 세계를 방해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일방적이고 세속적이며 이기적인 ‘정’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 p.83

버스가 도착했고 또다시 떠났다. 사람들도 이리저리 흩어져 떠나가고 마을도 점점 변해갔다. 우리 발밑의 대지는 몇억 년 동안 존재해 왔는데 나는 고작 몇십 년 살았을 뿐이며 내게는 휴대폰 한 대가 전부였다. 기적이 일어났을 때, 희망이 강렬해질수록 더 지독하게 엄습하던 고독감이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큰 소리로 울고 싶었다. 우리의 삶은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기적의 순간이 끝난 뒤에도 허수아비는 내 곁에 남아 따뜻하게 나를 바라봐 주었다. 우리를 둘러싼 해바라기만이 아주 조용히 자라나며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희망을 전하고 있
었다.
--- p.111

엄마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이 구름 조각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구름은 천천히 변해서 점점 평범해졌다. 그럴수록 엄마가 고민 중인 말들은 더욱 화려해졌다.
여전히 한 곡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엄마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때 토끼가 사라졌다. 엄마는 토끼와 구름 사이에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다. 토끼와 구름 모두 흰색이었다.
--- p.127

엄마는 싸이후에게도 애틋한 존재였다. 그 애틋함은 엄마가 주는 안정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안정감은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기도 했다. 싸이후는 토끼도 애틋하게 여겼다. 엄마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토끼를 보여 주었을 때, 싸이후는 꿈결에 무언가를 만지듯 아주 천천히 입으로 살짝 새끼 토끼를 건드렸다. 이 생명체가 자기 자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었다. 싸이후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아름답다는 걸 아는 듯했다.
--- p.150

진정한 농부는 몇 년간 농사를 짓고 나면 몇 년은 땅을 쉬게 두었다가 씨를 뿌린다. 또는 몇 년간 해바라기처럼 땅에 무리를 가하는 농작물을 심었다면 그 후 몇 년은 토양을 재생시킬 수 있는 거여목 같은 작물을 심는다. 농경지도 돌아가며 갈아야 하고 목장도 돌아가며 목축해야 한다. 유목민이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은 대지가 충분히 휴식하고 회복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 p.262

해바라기는 아름다움과 행복의 상징이다. 하지만 해바라기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씨앗일 때의 해바라기, 새싹일 때의 해바라기, 막 줄기가 나왔을 때의 해바라기, 꽃이 필 때의 해바라기, 씨를 품었을 때의 해바라기, 최후에 남은 줄기와 해바라기 기름까지,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해바라기는 꽃을 피우고 찬란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지내는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기다림과 인내 속에서 보낸다. 사람에 비유한다면 묵묵히 인내하며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과 닮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해바라기의 황금빛 찬란한 순간에만 열광하며 그 외 다른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글에서도 너무 많은 것들, 해바라기에 대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그것들은 언급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론 확실히 알고 있다. 분명한 건 자신의 나약함과 허영 때문이라는 것을.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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