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 저녁, 긴 방죽을 따라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면, 아버지는 다시 어머니를 마중하러 둑방 계단을 올라서곤 했지요. 멀리 도심의 화려한 불빛을 지고 어머니가 돌아오십니다. 아카시아꽃잎처럼 머리칼에 핀 몽실몽실한 솜먼지가 어머니 노동이 얼마나 고되고 또한 아름다웠는지를 말해줬어요. 아버지는 말없이, 풍성한 어머니 머리카락 사이에 피어난 솜꽃을 하나하나 떼어내 주셨지요. 그 모습은 마치 앙상한 나뭇가지 위 쓸쓸하게 서로를 보듬는 겨울새 한 쌍 같았지요.
--- p.15
청관스러움도 지나치면 청맹과니가 됩니다. 털털하고 담백해야 세상도 편하게 보입니다. 마음이란 건 덥석 주고받아도 오줄없지만 넌지시 거절하는 건 더 상그럽습니다.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 편하자고 남의 호의를 들이지 않는 건 소견이 좁은 짓이지요. 움찔 밀어내고 슬쩍 털어내는 건 청관스러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인정을 마다하는 염치가 무슨 소용이며, 사람 냄새 나지 않는 청관스러움이 어디에 쓰일 것인지요.
--- p.22~23
아부지는 호신용 지팡이로 얼음판을 툭툭 건드리며 길을 내었습니다. 언 강을 건너본 자들은 육감적으로 그들만의 길을 알아냈습니다. 물살의 세기나 물길 지형에 따라 얼음 두께가 조금씩 다르다고 했습니다. 빙판길 아버지의 이마 위로 노을빛이 잦아들었습니다. 모래톱 위에도 석양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금세 동녘 낮은 하늘가엔 섣달 보름달이 떠오를 터였습니다. 간간이 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가 이어졌습니다.
--- p.36
베테랑일수록 전문 산행가일수록 꾸러미는 간소합니다. 명필일수록 붓 자루 수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명강사일수록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과 같지요. 많거나 크다고 좋은 건 아닙니다. 작거나 가벼울수록 나을 때가 많습니다.
--- p.51
밥이라면 고봉밥이어야지요. 밥주걱 든 입장이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일 겁니다. 줄 게 마땅찮으니 밥이라도 따뜻이 먹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상대도 그 마음을 알고 최선을 다해 밥상 앞에 앉는 거지요.
--- p.56
모든 이를 친구 삼겠다는 생각만 버려도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친구를 얻으려면 먼저 친구가 되어주면 됩니다. 우정이 없다고 신세타령할 시간에 우정을 찾아 나서면 됩니다. 상대에게서 완벽함을 찾는 게 아니라 결핍이나 과잉마저 인정할 때 우정은 지속됩니다.
--- p.80
이제껏 버리지 않아서 거추장스러웠던 적은 있어도, 버리고 나서 후회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버리지 않아서 다행인 게 세상엔 얼마나 많은지요. 그간 너무 쉽게 추억이나 향수를 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언젠가부터 복고의 풍경이 아슴아슴 떠오르더니 턴테이블이 갖고 싶어졌습니다.
--- p.84
공자가 정의한 좋은 사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의롭지 못한 이들이 미워하는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이라면 부조리 앞에서 단호하게 비타협을 실천할 것이며, 어려운 문제 앞에서 사심 없이 공정함을 논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착한 사람은 좋아할 것이지만, 나쁜 사람은 미워할 것이 자명합니다.
--- p.87
시간과 우정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닙니다. 학창 시절 친구가 아무리 좋다 해도 서로 도움 주는 이웃만 못하고, 직장 동료와 종일토록 붙어 있다고 해도 마음 먼저 닿는 먼 친구만 못합니다. 한마디로 때와 장소 등 물리적 요인은 관계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래 알아왔다고 우정이 깊은 것도, 자주 만나는 사이라고 절친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 p.92
토마스 만의 일관된 방향처럼 사랑엔 공평한 저울추가 없습니다. 더 사랑해서 패배하거나, 덜 사랑해서 상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만 있을 뿐이지요. 덜 사랑한 자는 무관심해서 상기할 추억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되지요.
--- p.124
저자에 의하면 우리의 예절교육은 약자가 강자에게 바치는 일방적인 헌사를 의미한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절에 관한한 강자의 그 어떤 역할도 약자만큼 구체성과 강제성을 띠지는 않습니다. 공자가 강조하는 예의 본질이 인간 심성의 참된 교류에 있지 결코 위계의 선후를 따지는 치졸함에 있지는 않을 터인데 말입니다.
--- p.138
사심 없이 가벼운 사비나의 눈에는 삶 이면의 불합리와 부조리가 너무 잘 보입니다. 배반이 어울리는 사비나는 입버릇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투덜거립니다. 사비나가 얻은 결론은 부조리한 키치적 삶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진실하다는 것이지요.
--- p.149
사는 게 항상 환희의 꽃밭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자갈밭과 꽃밭의 무한한 변증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때는 무심코 불어오는 바람에 상처 입은 꽃잎이 되고, 또 어떤 때는 시린 무릎을 힘겹게 굽혔다 일으켜 세우는 나귀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음 속 손수건 한 장이 있는 한, 수백 번 흔들리고 무너질지언정 곧장 패배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사실.
--- p.156
환대의 시늉도 없고 포장의 허례도 없는 꽃. 향기 아래 가시를 박지도 않고, 미소 뒤로 우울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꽃송이보다 큰 꽃받침으로 꽃 본연을 갉아먹지도 않고, 넘치는 향기로 꽃잎을 미혹에 빠뜨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담박하게 피어 있을 뿐입니다. ‘나 이런 꽃이니 알아주시오.’ 하지도 않습니다.
--- p.177
사랑은 어리석음이요, 유치함이요, 수치요, 절망이요, 나락입니다. 사랑을 일컬어 현명함이요, 세련됨이요, 자긍이요, 희망이요, 천국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사랑이란 감정을 초월했거나 겉보기 사랑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사랑이란 말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p.181
환희의 꽃밭인 줄 알았지만 소금밭을 헤매는 바람. 키질에 남는 열매보다 풍구에 날아가는 쭉정이라야 ‘찐’인 사랑. 오늘도 사랑 때문에 누군가는 핸드폰 문자를 수십 번 확인하고, 울리지 않는 현관 벨 소리에 귀를 당겨 세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속수무책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고 무너질 3초가 아니면 사랑이 아니니까요.
--- p.185
덧놓이고 흐트러진 신발들을 다시 갈무리합니다. 피로처럼 달라붙은 뒤축의 흙을 털어내고, 통증처럼 내려앉은 신발 속 먼지도 닦아냅니다. 신발코가 현관 쪽으로 향하도록 한 켤레씩 돌려놓습니다. 신발들 금세 새초롬하니 단정해집니다. 신발을 돌려놓는 작은 행위는 자기수양을 구하는 안으로의 수렴이자 타자이해를 실천하는 외적 발산입니다.
--- p.215
사진학적 눈썰미에서 자유로울수록 글 곁의 사진은 풍부한 함의를 지닐 수 있겠지요. 하잘것없고 무의미해 보이는 장면일지라도 제 식의 정서가 스며들면 기꺼이 셔터를 누릅니다. 한 컷이 품은 뜻밖의 의미들을 풀어내는 이 작업이 자못 흥미롭습니다.
--- p.220~221
약점 많은 사람끼리 잘 지내려면 거리가 필요합니다. 여염집 담장에 피어난 제라늄 화분만큼의 거리면 딱 좋겠습니다. 적당한 거리가 유지된 만큼 꽃끼리 뭉치는 법도 없고, 남의 화분을 침범할 이유도 없습니다. 안심 거리를 확보한 꽃들은 거리낄 것 없이 화사한 빛깔을 피워 냅니다.
--- p.232
꽃 진 자리는 통곡의 바다이자 상처의 실존입니다. 하지만 상처는 곧 힘이 됩니다. 그것으로 새로운 꽃망울을 말아 올립니다. 결곡하게 피운 꽃은 또다시 향을 내뿜고 열매로 보답합니다.
--- p.240
그러하니 오늘밤도 몇 번씩 제 귀를 면도날로 오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당신, 당신이야말로 제 안에 해바라기 한 송이를 품은 예술가임을 잊지 않았으면. 그 원천은 용서할 만한 이성이 아니라 달떠도 좋을 감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격정의 드라마 없는 예술혼이 가당키나 할까요.
--- p.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