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사용료를 받고 있지만 마치 특급호텔 프런트에서 고객을 상대하는 것 같은 여유가 느껴졌다. 바이칼 호수를 등에 지고 관광 안내 겸 버스 티켓을 판매하는 여직원도 보았다. 버스 기사와 나누는 대화를 보면서 그 말투나 표정에서 자신의 일을 얼마나 따분하고 하찮게 여기는지 느낄 수 있었다. 유료화장실에서의 우아한 모습을 발견하기도 힘들겠지만, 바이칼에 대한 감동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여직원의 모습도 희한했다. 정말이지 관광객의 감성에는 눈곱만큼도 공감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면 세상을 좀 더 다르게 바라보지 않을까. 공용 화장실을 자신만의 아름다운 세계로 만들어 가는 여성분이나 수많은 사람의 버킷리스트를 동네 강아지 쳐다보듯 하는 여직원이나 우리는 저마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 p.59
조금 이르지만 이미 은퇴를 한 친구도 있고, 구체적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있는 친구도 있다. 33년째 같은 직장에서 근무한 아내와 달리, 나는 다양하고 많은 일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 와중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인생 후반전, 아내의 전폭적인 응원에 힘입어(무슨 일이든 항상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겁 없이 들어왔다. 5년 혹은 10년 아니면 그보다 더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이 글을 읽고 있을 나를 상상해본다. 첫 번째 책의 에필로그를 적고 있지만, 내 인생의 후반전을 여는 프롤로그가 될 것 같다. 책을 쓰고, 배낭을 메고 여행도 다니면서, 죽는 날까지 심장이 두근거리는 삶을 살고 싶다. --- p.72
밥 먹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생각으로 시간을 아꼈던 나와는 달리, 아내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아내 덕분에 한 끼가 ‘때우기’가 아닌 ‘밥상’이 되었다. 잊어버렸던 “맛있다”라는 말도 되찾게 되었고, 밥 먹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되어 가고 있다. 밥상에서 “깨끗이 먹어야 한다”라는 잔소리는 여전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빨리 준비해 말없이 먹고 일어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밥 먹는’ 시간으로서의 공간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다. 질려서 먹지 못했던 음식과, 국을 먹게 되었고, 직접 요리도 하게 되었다. 나름 자신 있는 요리도 생겼다. 볶음밥, 카레, 떡볶이는 아내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벤트로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 p.106
결혼, 홈스쿨, 퇴사, 시골생활, 다자녀 아빠까지. 혼자서는 쉽지 않을 길이었다. 항상 나에게 힘을 주고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은 아내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퇴사 후 4년간의 시간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만이 갈 수 있는 길을 찾아가고 있다며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다. 가끔 잘 가고 있는지 뒤돌아보게 되거나, 걸음을 멈추고 고민에 빠지는 날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문장을 떠올린다.
“가기 쉬운 길과 무난한 일은 나중에 어려워지기 마련이고, 힘든 길과 어려워 보이는 일은 나중에 종종 쉬워지기 마련이다” --- p.132
종갓집 맏며느리인 나를 엄마는 항상 안쓰럽게 바라보신다. 나이 들어 중년이 된 지금도 그 순간만큼은 엄마에게 어리광 피우고 싶어진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면서 몸살기가 도는 느낌이다.
“엄마, 나 머리 아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엄마는 싱크대 문을 열고 우리 집 만병통치약, 판피린 한 병을 꺼내 오신다. ‘따다닥’ 작은 병뚜껑을 따고 홀짝 마신다. 빈 병에 물을 조금 넣어서 마시면 뒷맛이 달콤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약사인 막내 동생이 짜증을 낸다.
“아, 쫌! 어디 아프면 나한테 증상을 말하라고. 기침이면 기침, 두통이면 두통, 증상에 맞게 약을 줄 테니까. 판피린만 자꾸 먹지 말고” --- p.151
그날은 누군가가 완벽하게 세상을 센티멘탈하게 연출한 것 같았다. 때마침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는데 눈이 폴폴 날리고 있었다. 어제 일기예보에 강원도 아침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고 했고, 봄치고는 추운 날이라고 해도 눈이라니. 얼른 베란다 문을 열어 보았다. 그것은 어제까지 한창이던 벚꽃잎이 간밤 추위에 낱낱이 흩어져 바람에 휘날리는 것이었다. 꽃잎이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6층 우리 집 베란다를 이리저리 지나쳐 가고 있었다. 그때의 물리적인 환경과 묘하게 어우러진 마음을 설명할 능력이 없다. --- p.183
가끔 지인의 병문안을 가곤 했었다.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의학이 발달해서 치료가 잘 될 거예요. 힘내세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하지만 내가 지인에게 했던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듣는 입장이 되니 전혀 다르게 들렸다. 처음엔 덤덤히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에 대한 분노, 원망, 자책이 자리 잡았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속에서 갈등과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고, 때로는 서운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했던 위로들이 진심으로 다가갔을까? --- p.210
인터넷에서 우연히 〈마침표와 쉼표에서 배우는 것〉이라는 글을 읽게 되었다. 문장이나 글에서 적절한 문장부호를 사용해야 하듯, 삶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 쉼표를 찍거나, 쉼표를 찍어야할 때 마침표를 찍게 되면 문맥의 의미가 이상해지거나 잘못 전달되듯, 삶에서도 마침표와 쉼표를 잘 구분해서 붙여야 후회를 적게 한다고 했다.
‘어떤 문장부호가 가장 많을까?’
‘인생의 문장부호를 적절히 붙이며 살고 있을까?’
---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