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말기로 접어들어 좋은 점은 사람들과 싸우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우울증 초기, 아니 중반까지만 해도 세상만사가 못마땅하고, 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여겨져 억울하고, 짜증이 났는데, 이제는 그게 없다.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일었다가도 금세 그게 맞나 싶으면서 저절로 물에 떨어진 물감처럼 풀려버린다. 자기 확신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좋아하지 않고 못 믿는다. 정신과 의사는 무던히도 그런 날 바꿔주려고 노력했다.
“근태 씨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데요. 그리고 아직 젊잖아요.” “제가 젊다구요?” “그럼요.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려요.” 정신과 의사가 나보다 한두 살 어릴 거라 여겼었기에, 솔직히 놀랐다. 그래도 어디 가서 노안이라는 소리는 안 들었었는데, 이젠 그것도 유효기간이 끝났구나. 눈도 노안(老眼), 얼굴도 노안(老顔)! “100세 시대에 마흔네 살이면 아직 반도 안 산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까 더 암담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피곤해 죽겠는데 아직 반도 안 온 거라니. 이렇게 하자투성이인 몸으로 앞으로 50년을 어떻게 더 사냐고? 해결책은 정말 자살밖에 없구나.
--- p.82~83
“내가 준 수면제 술에 다 탔어?” 나는 보라가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그래서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 하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대꾸한다. “응. 소주에만. 넌 맥주만 마셨지?” 익숙한 목소리다. “그럼. 내가 누군데? 오빠가 아 하면 어 하는 오빠의 파트너라고.” 오빠라면, 이 세상에서 보라가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장성수뿐이다. 아, 이런 못 말리는 의처증. 또 보라가 장성수와 바람을 피우는 꿈을 꾸는 모양이다. “수면제에 내성이 생겨 그런가, 그 정도 약이면 저 인간 진작 뻗었어야 하는데 어쩜 그렇게 오래 버티냐.” “나도 너 빨리 안고 싶어 미치겠는데 문은 안 열리고, 아무리 갈매기 신호를 보내도 응답이 없어 속이 까맣게 탔다.” “그랬쪄? 우리 오빠 고생 많았네. 근데 나도 저 인간이 폭탄주를 만들어주겠다고 설쳐서 철렁했어. 또 갈매기 소리가 이상하다고 하질 않나.” “기다리다 지친 갈매기라 그렇지. 조금만 더 시간 끌었으면 그냥 뛰어 들어와서 죽여버렸을지도 몰라.” 헉. 누구를?
--- p.99~100
“으, 맛있는 냄새!” 보라가 침까지 삼키며 조르르 장성수 옆으로 달려간다. 장성수는 그런 보라의 입에 구운 고등어를 한 점 뜯어 넣어준다. 그 모습을 흘끔 보기만 했는데도 구토가 날 것 같다. “진짜 고소해.” “그래. 그래서 대구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도 바로 이 고등어라니까. 냄새만 맡으면 아주 환장을 하고 떼로 달려들지.” “사람인 줄도 모르고?” “고등어 기름을 발라놨으니 걔들은 고등어인 줄만 알지. 그래서 덥석! 그럼 권근태는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대구 배 속으로 사라지는 거야.” 세상에 태어나 들어본 농담 중에 가장 재미없고 끔찍한 이야기다. 뭐 나한테 고등어 기름을 발라 대구 밥으로 준다고?
그런데 보라는 나와 다른 의견을 피력한다. “진짜 완벽한 완전범죄네?” “그럼, 그럼. 내가 형사 생활하면서 몸소 체득한 건데 이제 우리나라에서 CCTV랑 카메라에서 자유로운 곳은 바다밖에 없어. 깊은 산속 오지도 누군가 숨어서 핸드폰으로 찍어댈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지만 바다는 그럴 수가 없거든.” “그러네. 오빠 진짜 똑똑하다.” 똑똑하긴 개뿔! 이보라 너 진짜 제정신이냐? 내가 고등어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 내 몸에 고등어 기름을 발라 대구 밥으로 준다는데 그딴 소리를 할 수가 있어? 내가 아무리 눈을 부라려봤자 두 사람에게는 내 의사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는 허리의 힘을 이용해 묶여 있는 다리를 요동치게 만든다.
--- p.110~111
찬 바닷물에 푹 빠지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있는 곳은 잡은 고기를 넣어두는 수조다. 장성수는 그 수조의 뚜껑을 열어놓은 채 나를 푸시해 내가 이곳으로 입수하게 된 것이다. 윙 하는 엔진 음과 함께 배가 출발하고 나는 짠 바닷물에 절여진다. 한 시간 후쯤, 배가 망망대해 한가운데, 다른 배들도 일절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해서야 장성수는 나를 수조에서 꺼내준다. 그때까지 나는 수조에서 죽지 않기 위해 온몸으로 발버둥을 쳤다. 처음 출발할 때는 물의 깊이가 내 가슴까지밖에 안 돼 가만히 서 있으면 됐지만 배가 점점 바다로 갈수록 수조로 들어오는 물의 양도 많아져 나중에는 수조의 입구를 손으로 붙잡고 고개를 내밀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발버둥을 쳐본 적은 난생 처음이다. 내 사랑의 위대함에 나 스스로도 놀랐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꽃을 사주고, 가방을 사주는 남자들은 많아도, 나처럼 이 추운 바닷물 속에서 한 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는 남자는 흔치 않을 거다.
--- p.208~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