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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스나르의 구두

유르스나르의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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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2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338g | 130*186*16mm
ISBN13 9791190635080
ISBN10 119063508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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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 꼭 맞는 신발만 있다면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이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지금껏 완벽한 신발을 만나지 못한 불행을 한탄하며 살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고 싶은 곳, 가야만 하는 곳 모두에 내가 가지 못한 것은, 또는 가는 걸 포기한 것은, 모두 내 발에 꼭 맞는 신발을 갖지 못한 탓이라고 말이다.
--- p.4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건가. 당신 인생은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프랑스의 입국 허가를 얻기 위해 건강진단을 하러 갔을 때 그리스도교계의 병원 의사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린 것은 고베를 떠나기 석 달쯤 전의 일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가지 않으면 저도 유럽도 변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대답이 안 되는 내 대답을 듣고 그 자신도 젊었을 때 프랑스의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중년의 의사는, 제멋대로인 여동생에게 애를 먹는 오라버니 같은 얼굴을 하더니 난감하군, 하며 웃었다.
--- p.86

계속 보고 있으면 너는 늘 그렇더라고. 요즘 뭔가 우울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넌 스스로 깨닫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잠깐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더라고.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여행을 다녀오면 아주 가벼워져서 돌아오는 거야. 어쩐지 여행지에 묵직한 스웨터라도 벗어 던지고 오는 것 같아. 딱 하루 파리를 떠나는 것만으로도 너는 아주 가벼워져서 돌아오더라고. 공부, 공부 하며 딱딱하게 있지 말고 가끔 여행 좀 해. 아마 너한테는 여행이 맞는 걸 거야.
--- p.94-95

로마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날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그처럼 최후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때 만난 사람이 남편이었다. 그 후 남편과 보낸 5년간, 경솔하게도 어깨를 펴고 어둠과 대결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어버렸다. 그를 덮친 갑작스러운 죽음. 그것에 이어지는 새로운 어둠을 만나고 나서야 그때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허상과 실체 사이에 가로놓인 도랑의 깊이를 나는 배웠다.
--- p.125

어휘 선택, 구문의 정확성, 문장의 품위와 사고의 강인함. 이것들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것이 유르스나르에게는 영혼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기쁨이고, 그것 없이는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만큼 강한 욕구였을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미국의 토양은, 그녀에게는 피리를 불어도 아무도 춤추지 않는 황야였다. 설령 프랑스어를 이해하는 그레이스가 곁에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 p.130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유르스나르는 다시 몇 차례나 초고를 정리해보지만 이것도 버리고 만다. 자료를 수집하고 이거라면, 하고 쓰기 시작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너무 젊다. 마흔 살이 되기 전에 도전해서는 안 되는 책이 있는 것이다.”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유르스나르는 아직 10년이나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 p.134

썼다가는 지우고 지웠다가는 다시 쓴다. 안개가 짙은 날,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신호등 때문에 쉬이 나아가지 못하는 장거리 열차처럼 불안하게 나아가는 것 외에 글을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나이지만, 유르스나르의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왠지 깊은 위로를 받는다. 나의 무력감 앞에서 초조함을 느껴 좋을 리가 없는데도 왜 위로를 받는 걸까. 아마도 당시 그녀들의 나이이기도 했던 마흔다섯 살부터 2, 3년간, 나 나름대로 가질 수 있었던 열에 들뜬 것 같은, 광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속도와 체력과 집중력으로 일할 수 있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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