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매우 복합적이며 다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여러 계층에 속한 수많은 영감 받은 저자들에 의해 천 년 넘는 기간 동안 기록된 책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은 적지 않게 오해받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역자의 경험상, 성경 문학의 장르만 제대로 파악해도 수많은 오독을 피할 수 있다. 성경의 문학적 장르를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읽고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문자주의 성경 해석이 성경의 본뜻을 가리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여러 가지 문학적 장르가 총동원된 작품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성격을 가진 성경을 올바로 읽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유용한 도구로 ‘문학적 장르’(literary type)라는 새로운 렌즈를 현대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 「역자 서문」 중에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지혜 사상(그리고 성경의 다른 대부분)은, 옳은 행동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보상이 따르는 반면에 그릇되거나 어리석은 행동에는 반드시 재앙이 뒤따른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장 불경한 말을 내뱉었다고 볼 수 있는 욥이라는 사람은 그러한 견해에 반대한다. 욥기는 개인의 고난 한가운데서 필사적으로 그 의미를 찾고자 하는 책이다. 과연 죄와 고난 사이에, 그리고 의로움과 번영 사이에 어떠한 관계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성경의 몇몇 저자들, 특히 신명기,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의 저자들은 역사 속에서나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의지대로 결정된다는 견해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힘의 근본적인 가치와 정의로움의 근원적인 덕성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욥의 세 친구들에 의해 전개된 뛰어난 운문체 본문에, 그리고 산문체로 된 머리말 및 결말에 잘 반영된 이러한 관점은 욥 자신의 말을 통해 매우 격하게 의심을 받는다. 이 책의 구조는 욥기를 제대로 해석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 「제2장」 중에서
신약성경, 특히 예수의 수난 내러티브 안에 시편에 대한 암시들이 상당수 나타난다는 부분적인 이유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시편의 많은 부분을 “기독론적”으로 읽어 왔다. 즉, 시편의 내용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예수에 초점을 두고 해석했다. 이러한 접근은 “본문은 그 본문의 본래 저자와 독자에게 나름의 의미를 확실히 지니고 있다.”라는 기본 원칙과 충돌을 일으킨다. 시편의 본래적인 기능이 예전적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개인 탄원시와 제왕시 사이에서 병행적 요소를 발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에서 예수의 최후를 발견했다. 그러나 시편이 형성되었던 고대 이스라엘의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첫 번째 단계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여러 시편을 그것이 지닌 고대의 예배적 배경을 확인하면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 「제3장」 중에서
독자들은 성경에 이중 혹은 삼중의 자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두 가지 창조 기사(창 1-2장), 이삭이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한 세 가지 설명(창 17:17-19; 18:12-15; 21:6),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가 제공되었던 사건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출 16-17장; 민 11장), 십계명의 두 가지 이야기(출 20장; 신 5장), 고레스 칙령의 세 가지 이야기(스 1:2-4; 6:3-5; 대하 36:22-23), 주기도문의 두 가지 형태(마 6:9-13; 눅 11:2-4), 복음서 내의 여러 가지 이중 혹은 삼중 자료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세 가지 이야기(행 9장; 22장; 26장)를 비롯해서 미처 열거하지 못한 많은 예들이 있다. 이와 같은 평행 본문들은 문학적 차용이나 공통의 구전 자료, 아니면 그 밖에 어떤 것을 드러내는 것인가? 어쩌면 본문이 점차 확장되는 일련의 단계를 보여 주는 것일까?
--- 「제4장」 중에서
“묵시”(apocalypse)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파생된 것인데, “계시”(revelation)를 의미한다. 묵시를 통해 계시된 것은 천상의 세계에 관한 비밀이나 역사의 종말에 관한 비밀, 또는 그 두 가지 모두이다. 묵시 문학의 저자들은 위협받고 박해받고 기득권을 잃은, 그러나 지식 있는 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시대를 희망 없고 구원받기 힘든 타락한 시대라고 이해했다. 고전적 예언자들과는 달리, 묵시 문학가들(apocalypticists)은 회개하라고 설교하지 않았다. 회개하기엔 때가 너무 늦었다. 그 대신에, 그들은 현 질서가 지금이라도 급박하게 파괴되고 신자들을 위한 평화롭고 정의로운 왕국이 영광스럽게 도래하기를 고대했다. 현세의 악한 세력들이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게 될 것도 기대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날짜를 계산하기 위해, 묵시 문학가들은 종종 역사(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자신의 작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들의 역사 해석은 알기 어려운 상징들로 암호화되어 있고, 동물, 금속, 색깔 변화, 해(年)의 기하학적 숫자를 언급함으로써 시대들을 구분했다. 묵시 문학가들은 대개 고대의 유명한 사람들(에녹, 아브라함, 엘리야, 바룩 등)의 이름을 자신의 필명(筆名)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미 지나간 역사에 대한 보도가 앞으로 다가올 사건에 대한 예견의 형태로, 다시 말해서 작품의 연대가 과거로 소급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사후예언[事後豫言]).
--- 「제7장」 중에서
마가복음은 이사야 6:9-10을 인용하면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감추기 위해 대중에게 비유로 말씀한다는 놀라운 주장을 펼친다. 비록 몇몇 사람들이 예수의 실제 사역 안에서 이 놀라운 주장의 배경을 찾아보려고 노력해 왔지만, 마가복음 저자는 아마도 과거에 적용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의 메시지를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prediction)을 포함하는 이사야의 소명 기사처럼, 예수의 메시지도 대다수의 청중들에게 수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부분적으로 마가복음 저자는 비유들이 무엇을 전달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감추기 위해 의도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비유들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할 때 느끼는 좌절감을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
--- 「제9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