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니 하나 달라진 게 있었다. 어른을 보는 시선이었다. 어린이의 눈엔 하염없이 작아 보이던 어른들이 어른이 되어 보니 도리어 이제는 커 보인다. 그들이 매일마다 이뤄내는 작은 기적이 내 눈에는 보인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마음을 다잡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세상과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가족에게 전가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표정을 관리하는 모습이 보이고,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모습이 보인다.
--- p.33-34, 「어른스러운 어른은 되지 못했지만」 중에서
누군가 미워지기 시작하면 내 일상은 하루아침에 지옥이 된다. 그 사람이 내게 한 말과 행동이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 재생된다. 그럴 때마다 내 감정은 속수무책으로 날뛴다. 누군가를 미워할 땐 절대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내가 나의 일상을 짓밟는 행위라는 것, 나는 몇 년 전 누군가를 끔찍이 미워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 p.36-37, 「누군가가 미워지면 내가 하는 일」 중에서
자기반성의 나날을 보내며 지난 연애를 정리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어떤 짜릿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와 사귀고 있지 않은 지금의 이 상태가 매우 좋고 아주 마음에 든다는 생각이었다. 그와 헤어지는 건 분명 힘들었지만, 힘든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잘 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타인에 의해 감정이 휘둘리지 않아서 좋았고, 또 정확히 두 달째 한 번도 화를 내고 있지 않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홀가분하고 자유로웠다. 그와 만나기 전처럼.
--- p.85, 「연애를 하지 않아야 도달할 수 있는」 중에서
나는 지금까지 사는 게 너무 쉬워서 껄껄 웃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물론 이 세상엔 그들에게만 유독 삶이 너무 쉬워서 매일 밤마다 파티를 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우리는, 뭐든 쉽지 않다. 지긋지긋한 이 삶에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고, 어렵사리 벗어났더라도 새로운 삶에 만족하기 역시 쉽지 않으며, 노력한다고 좋은 결과를 얻기도 쉽지 않고, 잘나가는 친구와 내 처지를 비교하지 않기 또한 역시 쉽지 않다.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는 일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고, 마음 편히 잠에 들기마저 언젠가부터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희귀한 일이 되어버렸다.
--- p.118, 「‘쉽지 않아’라는 말」 중에서
긴 시간을 지나왔다. 좋고 싫은 것이 가득 담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한때는 좋아하는 것만 생각하며 세상에서 가장 긍정적인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한 적도 있고, 또 한때는 긍정에 지쳐 어둠에 푹 파묻힌 채 이 세상과 나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며 체념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오면서 다행히 지금의 나는 그럭저럭 좋고 싫은 게 반반씩 있는 사람으로서 친구와 지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이다.
--- p.123, 「높은 차원의 호불호」 중에서
나는 어렴풋이 자유가 무엇인지도 알게 된 것 같았다. 자유란, 단순한 삶이로구나.
--- p.141, 「삶이 더없이 단순해지는 곳」 중에서
살아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몸과 마음 여기저기에 다닥다닥 달라붙어버리고 마는 욕망들. 우리를 앞뒤 재지 않고 달리게끔 만드는 욕망들. 이중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나를 더 나로 살게 하는 욕망도 있는 걸까. 혹, 잘못된 욕망에 이끌려 한 60년쯤 산 후에야 실은 이 욕망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알게 되는 것 아닐까. 어떤 욕망들은 그 욕망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우리 삶을 더 팍팍하고 더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삶을 행복이 아닌 불행 쪽으로 몰고 가는 ‘만들어진’ 욕망들.
--- p.161, 「나는 매일매일 죽음을 생각할 거야」 중에서
알베르 카뮈는 우리는 나이 들수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사람과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누군가와 꼭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사람과 ‘만나야’ 한다고. 이는 지혜로우면서 적극적인 태도다.
--- p.181, 「서로 통한다는 건」 중에서
어떤 선은 우아하면서 단호했다. 그 선은 단호해서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단호해서 고결했다. 나는 이런 선이 보이면 그 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선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그 선이 그 선의 주인을 어디까지 데려갈지 궁금했다. 그러고는 이내 나는 그 선을 참고삼아 내 선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도 보고 애써 지우개로 지워도 보면서 내 선의 위치와 형태를 바꿨다. 나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배워서 아는 사람은 되고 싶었다.
--- p.201, 「선을 잘 그으며 살고 싶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