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를 끼고 형성된 모든 동네가 그렇듯 삼벌레고개에서도 재산의 등급과 등고선의 높이는 반비례했다. 아랫동네에는 크고 버젓한 주택들이 들어섰다. 아랫동네 주민은 대부분 자기 소유의 집에 살았고 세도 안 놓았다. 마당도 넓고 자동차도 있고 식성이 까다로운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니 정원사에 운전기사에 음식 솜씨 얌전한 식모나 보모도 있어야 했다. --- p.11
삼벌레고개에서 행해지는 모험의 등급도 고갯길의 등고선에 따라 나뉘었다. 아랫동네 소년들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고 부모 몰래 불량 냉차를 사 먹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축이었다. 반대로 윗동네 소년들은 극히 불온하고 위험해, 모험이라기보다 범죄에 가까운 짓거리에 물들어 있었다. 결국 소년다운 모험은 삼벌레고개 중턱 소년들의 몫이었다. ‘높이의 모험’과 ‘넓이의 모험’은 중턱 소년들이 즐기는 모험의 씨실과 날실이었다. --- p.13
스파이놀이를 하면서부터 은철은 삼벌레고개가 돌연 불길하고 을씨년스러운 기운에 휩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원과 같이 있으면 고추 끝이 저릿할 만큼 모든 일이 흥미진진하게 돌아갔다. 높이의 모험과 넓이의 모험 따위는 댈 것도 아니었다. “우리의 임무가 또 생각났어.” “뭔데?” “동네 사람들 이름을 알아내는 거야.” “왜?” “그래야 언제라도 독약을 만들 때 그 사람 이름을 막바로 외울 수 있을 거 아니야?” --- p.52
기름기를 많이 섭취한 육식이의 음성이 가장 감미로웠다. 재봉틀 의자에 앉아 낮은 허밍으로 노래를 따라부르던 새댁은 육식이의 바리톤이, 그리워라 안니 로리, 하고 높은 음에서 낮은 음으로 미끄러져 내릴 때면 자신의 가슴마저 무너져 내리는 듯해 재봉틀을 구르던 발을 멈추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태풍이 잦더니 구월 초까지 사나운 바람이 불었다. 더위를 식히는 바람이 삼벌레고개를 쏴아 훑고 지나가던 구월 초순 어느 날 밤 뚜벅이할배가 죽었다. 자연사라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기에 윗동네 아랫동네 할 것 없이 삼벌레고개가 온통 어수선했다. --- p.165
“그자들이 왔어요. 조사만 받고 바로 나올 수도 있고 아니면…….” 덕규는 말을 흐렸다. 새댁의 얼굴이 그다음 말을 하도록 해주지 않았다. 그는 기다렸다. 새댁이 말없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처음 그녀의 손을 잡던 십삼 년 전의 그날처럼 손에 땀이 배었다. “다녀오리다.” “다녀…… 오셔야 해요.” --- p.252
원에게서 원은 아버지가 딴 여자와 도망친 경우와 감옥에 갇힌 경우 중 어느 편이 더 나은지 알 수 없었다. 언니의 교과서에서 산사태와 눈사태에 대한 내용을 읽고 무거운 흙 속에 깜깜하게 갇히는 산사태와 차디찬 눈 속에 꽁꽁 얼어 갇히는 눈사태를 상상해보고 어느 것이 더 무서울지 알 수 없었던 때와 비슷했다. ‘사태’라는 말처럼 무서운 말은 없는 것 같았다. --- p.259
원에게서 사라져버린 것은 말뿐이 아니었다. 표정과 몸짓도 증발되었다. 원은 생기 없는 얼굴로 느리고 뻣뻣한 동작을 했는데, 그것은 동생 희의 모습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그 곁에서 은철은 눈물을 글썽이며 뭐라고 뭐라고 쉬지 않고 얘기를 했다. 스파이놀이를 하던 얘기도 했고 은행놀이를 하던 얘기도 했다. 난쟁이식모 얘기, 뚜벅이할배와 똥순할매 얘기도 했다. 그러나 안바바와 새댁 얘기는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