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의 친일 문제는 신사참배 문제로 국한되는 경향이 절대적이었다. 이제 한국 기독교의 친일 문제에 대한 인식과 논의는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바로, 신사참배의 범위를 넘어선 전쟁의 문제로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가 일제의 강요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측면에서도 친일에 앞장섰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9월에 발표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죄책고백 선언문에서 유일한 아쉬운 점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에 가담했다고 한 대목이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책임을 수탈의 극대화라는 외적 상황에 두는 방향으로 이야기하는 걸 지양해야 한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남긴 부정적 유산이 한국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꼼꼼하게 다시 따져 살펴봐야 한다.
--- 「 제1강: 우승열패의 신화에 빠진 기독교 민족주의_강성호」 중에서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는 남북의 기독교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남한의 경우 전쟁을 겪으면서 이전과는 다른 매우 독특한 기독교, 반공적 기독교가 만들어진다. 남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공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아주 이념적이고 반공적인 기독교가 형성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죽거나 팔다리가 잘리는 등의 부상을 당한 사람의 수는 35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가 3,000만 명 정도였으므로 거의 한 가정에 한 사람은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연히 생존이 최우선인 비정상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설교의 주제도 모두 생존뿐이었으니, 기복신앙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전쟁 이전에도 기복신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급속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문제는 기복적 기독교에는 신학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 믿고 복 받고 출세하고 건강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서 신학으로 남는 것은 오로지 반공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기복신앙이라는 배경 아래서 반공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 「 제2강: 남북분단, 전쟁 전후의 한국교회_김흥수」 중에서
지금까지 한국전쟁 전후 지휘·명령체계 속에 있던 기독교인들이 종교적 논리와 신념을 가지고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적극 가담했던 사실들을 확인했다. 그들의 종교적 논리와 신념은 해방 이후 전개된 기독교의 사상전에서 유래했고, 이는 공산주의 적대를 근거로 하는 냉전의 진영 논리와 동조·연동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냉전의 진영 논리와 기독교의 종교적 논리가 상호 동조하고 연동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왕래할 수 있는 통로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의 그 통로는 배타적 이원론이었다. 그리고 개인은 물론 모든 사회단체·국가·종교·문화를 선과 악, 진리와 거짓으로 구별 짓고, 자신을 선과 진리로, 자신과 다른 개인과 집단·종교·문화를 거짓과 악으로 분류하는 배타적 이원론은 오늘날 기독교에도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있다. (…) 기독교는 뼛속 깊이 박혀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그래서 기독교 내에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그냥 그런 것이 되어버린 배타성을 직면(直面)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직면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사상과 신념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포용해야 하는 이유와 근거를 알려주게 될 것이다.
--- 「 제3강: 한국 개신교와 국가 폭력_최태육」 중에서
2000년대 들어 한국의 개신교 집단은 민주화 이후 약화되어온 반공·반북 지향의 보수세력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설득력이 약해지고 있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역할 또한 하고 있다. 개신교 보수집단의 시국 집회는 보수 언론들로부터 ‘애국적 기독교의 궐기’로 칭송을 받기도 했다. 개신교 반공주의, 더 넓게는 개신교 보수주의에 대한 연구가 갖는 현재적 의의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사회 전체로 볼 때 반공주의적 세력과 담론의 약화 추세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반공주의에서 발견되는 이런 ‘강력함’과 ‘지속성’의 원천은 무엇일까? 개신교 반공주의가 보여주는 ‘끈질긴 생명력’의 비결은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또한 최근의 변화된 국제적, 정치·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신교 반공주의는 어떤 변화를 겪고 있으며, 그 특징들은 무엇인가 하는 점 또한 흥미로운 관심사일 것이다.
--- 「 제4강: 한국 개신교와 반공주의_강인철」 중에서
박정희 정권의 종교정책이 보여준 특징은 다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종교 통제가 전반적으로 강화됐다는 점, 둘째, 국가와 민족을 성화하고 국가가 윤리적 교사로 나서 시민사회를 지도하는 모습, 셋째, 불교·개신교·천주교 등 3대 종교에 대한 특권의 유지 혹은 추가, 넷째, 특히 쿠데타 직후에 나타났던 종교정책의 탈(脫)그리스도교화, 다섯째, 저항적 종교부문에 대한 억압 및 배제, 견제와 고립화가 그것이다.
--- 「 제5강: 한국 개신교와 군사정권_강인철」 중에서
독재정권의 공포정치는 한국 기독교의 친미주의를 강화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마디로 한국 기독교의 친미주의에는 ‘공포정치’라는 심성구조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를 위해 한국 기독교는 파편화되어 있고 불완전한 개인의 기억들을 ‘순교’라는 서사로 통합시켰다. 순교 담론을 창출하여 끊임없이 박해의 기억을 재생산했다. 한국 기독교는 전쟁의 기억을 아주 강렬하게 공유하는 집단 중 하나가 되었다.
중요한 점은 공포의 심성이 냉전의 논리와 결합하면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전쟁 이후 한국 기독교의 친미주의가 반공주의를 촉진하거나 보강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즉, 한국 기독교는 순교 담론을 통해 북한과 공산주의라는 적을 환기시켰고, 미국 담론을 통해 친미주의를 재생산했다. 이 두 가지는 반공주의를 강화했다. 사실상 순교-반공-미국 담론은 유기적으로 이루어진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 「 제6강: 미국은 한국 개신교에게 무엇이었는가_강성호」 중에서
요컨대 혈통적 교회세습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려와 비판은, 내가 보기에는, 그 센세이셔널한 현상에 집착하다 숲의 문제를 읽지 못한 채 썩은 나무만을 찍어내려고 하는 관중규표(管中窺豹)의 오류가 될 수 있다. 그 대나무구멍(管)의 바깥에는 99.5%가 넘는 교회들에서 담임목사가 혈통적 세습이 아닌 방식으로 임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정당한가? 그것은 부당하지 않고 부조리하지 않은가? 그것은 사회적 특권화를 조장하고 공공성을 훼손할 우려가 없는가?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혈통적 교회세습이 아니더라도 권력세습이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 제기인 것이다.
--- 「 제7강: 교회의 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_김진호」 중에서
그동안 보수우익 개신교는 정치시장의 유권자, 수요자로만 간주되어왔다. 하지만 이제 극우-보수 개신교는 극우 의제와 가치관, 더 나아가 구체적 실천전략의 공급자로서 위상을 갖게 되었다. 특별히 극우-보수 개신교는 극우정치에 포퓰리즘적 토대와 계기를 제공한다. 이들은 세를 과시하는 기존의 ‘광장 정치’ 전략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정치/신앙교육과 온라인/미디어 전략도 함께 사용한다. 이러한 전략들을 통해 이들은 보수정치(이데올로기) 장에서 혐오를 ‘팔릴 만한 상품’으로 공급함으로써 급격한 사회변동과 불안,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수요를 창출하고 극우이데올로기 시장을 확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기존의 낡은 반공주의와 그에 대한 위기의식을 대체하거나 보충해서 새로운 담론, 이데올로기, 서사, 정서를 대중들에게 일상적으로 공급하고 혐오와 차별을 조장함으로써 극우정치 의제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다수자 인권’이라는 오도된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국민 대중에게 상대적 박탈감이나 소외감을 유발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통한 차별주의 여론을 동원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렇게 극우 개신교 세력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저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감내하며 인정투쟁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현실적 고통의 (전도된) 이유를 설명하고 원인 제공자를 제시함으로써 혐오와 차별의 정당성을 제공하고 있다. 현실의 고통과 소수자들의 희생을 자양분 삼아 한국 사회의 극우화를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종교의 자유’란 ‘혐오하고 차별할 자유’, ‘종교폭력의 자유’일 뿐이다.
--- 「 제8강: 극우 개신교의 역사적 진화와 논리_김현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