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학자들은 처음부터 신체를 소외시키는 데 익숙하다. 문화학자들은 상징이나 은유(metaphor)를 비신체적인 맥락(non-somatic context)에서 바라본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레슬리 화이트(Leslie A. White)다. 상징은 기본적으로 언어의 문제이고, 언어는 비신체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는 상징을 상징물(象徵物, symbolate)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언어적인 신체가 가지는 상징성(symbolism)을 간과하는 것은 인류의 문화, 그것도 특히 축제나 의례를 파악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도리어 신체는 비언어적이기(말이 없기) 때문에 더 풍부한 상징, 다원 다층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그것을 운반하는 매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31
신화가 신체를 통해 자연과의 교감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상징-의례 체계라면, 역사는 자연과 멀어진 상태에서 개념으로 무장된 역사학자가 기술하는 개성 기술적인 작업이다. 신화가 종교적 특성과 연결된다면 역사는 과학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신화-의례-종교, 역사-책(text)-과학의 상관성을 느낄 수 있다. 전자에는 신이 살아있지만, 후자에는 신이 없다.
--- p.54
인간의 문화를 크게 신화(mythos)와 과학(logos)으로 분류하면, 신화의 계열에 시와 신화-신화와 축제-자연과 범신이 있다면, 과학의 계열에 역사와 철학-스포츠와 예술-종교와 과학이 전자의 대칭의 자리에 있게 된다. 이 중에서 스포츠와 예술은 로고스에 속하지만 그것의 신체적(물질적) 특성으로 인해서 가장 신화와 연속성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스포츠와 예술의 언어는 바로 신화의 신체적 언어인 상징적 의례, 혹은 의례적 상징을 부활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는 비합리적이고 과학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종래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사회의 현지 조사와 연구를 통해 그들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사고를 해왔음을 보여주었다. 『야생의 사고(La Pense Sauvage)』를 비롯한 일련의 구조인류학적인 연구물들이 그것이다. 신화의 상징과 과학의 실증은 서로 다른 합리성의 추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을 ‘인과적(因果的) 신화’라고 말한다면 신화는 ‘상징적 신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55~56
현대인은 그 어느 시대보다 과학 기술 만능의 시대, 기술 사회에 살고 있다. 기술 사회에 살고 있을수록 예술의 가치에 주목하여야 본래인간의 인간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부응할 때 비록 현실적으로는 ‘공인받지 못한 몸’이거나 ‘소외된 무예인’이 될지라도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무예인의 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가 점차 중요해지는 시대가 되면 무예와 스포츠·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존재 가치를 더 높이게 될 것이다. 신체는 신이 거주하는 장소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체 자체가 신이라는 관점에서 신체를 성스럽게 바라보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대상으로 보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존재가 되듯이, 신체를 대상(육체, 물질)으로 보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존재가 된다. 그런 점에서 신체적 존재를 깨닫는 것은 한없이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깨달음은 항상 여반장(如反掌)인 것이다.
--- p.72
신체적 존재론은 인류 역사에서 발생한 모든 철학을 벗어나서 바야흐로 존재 그 자체에 도달한 철학이다. 철학이라는 것이 의식의 안(동굴의 안)에서 의식 밖에 있는 사물을 본 결과라면, 철학자는 항상 기존의 의식을 벗어나야 하는 임무(mission)에 직면하게 된다. 말하자면 항상 기존의 의식에서 탈출하는 노력의 연속이 철학사다.
인간의 의식(인식)과 감각이 바로 존재에 대한 ‘동굴의 의식’이다. 그런데 이제 철학은 그러한 존재의 안과 밖을 설정한 자체가 바로 철학의 굴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존재는 선후·상하·좌우, 그리고 최종적으로 안팎이 없다는 것을, 인간이 그렇게 바라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체적 존재론에 이르러 깨닫게 된 셈이다.
--- p.88
결국 이상을 ‘동일성-과학’과 ‘상징성-시’와 ‘존재성-무’로 정리하면, 신체적 존재론은 ‘존재성’에 해당하는 존재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야말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신체적 존재론의 결론이다. 신체적 존재론의 ‘신체’는 잡을 수 있는 육체(물질)가 아니라, 잡을 수 없는 ‘생성(생멸)하는 신체’의 의미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연은 신체적 존재이면서 본래존재다. 역으로 본래존재는 신체적 존재다. 신체적 존재론은 인간을 자연으로 되돌려 놓는 철학이다.
신체적 존재론은 존재론과 현상학을 극복한 제3의 철학일 뿐만 아니라 유심론과 유물론, 유신론과 무신론 등 모든 이원 대립을 극복하는 제3의 철학이다. 신체적 존재론은 ‘살의 철학’이고, ‘삶의 철학’이고, ‘존재론의 완성’이고, ‘원시반본의 철학’이고, 한글로 ‘몸 철학’의 시작이다. 신체적 존재론의 입장에서 보면 은유는 존재로 향하는 언어이고, 환유는 과학으로 향하는 언어다.
--- p.189~190
신체적 존재론은 무엇보다도 심신 일원론의 태도에서 출발하지만, 새로운 시대정신과 마음의 중심을 개개인이 온전하게 형성하게 함으로써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것을 지향한다. 그런 점에서 신체적 존재론은 종래의 역사적인 실천이나 현상학적인 삶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땅과 그 땅에서 전개된 역사와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이성과 지식과 개인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신과 신화와 공존을 환기시키는 것이야말로 구원이 되고, 치유가 될 수 있다. 인간은 기술이 발달할수록 반대로 신화와 함께 상징적 삶을 회복할 것을 필요로 한다. 신화와 상징과 신바람과 정령(spirit)이 없는 삶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삶의 도처에서 이용과 이익만을 찾고 의리와 겸손을 찾지 않는다면 삶은 머지않아 지옥이 될 것이다.
--- p.256~257
동서양 문명의 차이를 『천부경』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서양 문명은 인간을 중심(기준)으로 하는, 혹은 인간을 지평(地平)으로 삼는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이 있는 ‘천지중인간’이다. ‘천지중인간’은 인간 중심적-소유적 사유를 하게 된다. 이것은 물론 오늘의 서양철학으로 보면 현상학적인 차원이다.
이에 비해 동양은 ‘인중천지일’의 사유를 한다. ‘인중천지일’은 자연 중심적-존재적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도 여전히 자연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서양철학으로 보면 존재론적 차원이다.
--- p.303
철학사적으로 보면 프랑스의 ‘현상학적인 의미의 신체’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인 의미의 신체’를 융합한 ‘신체적 존재’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전통철학으로 보면 몸과 마음이 하나로 있는 '몸’의 의미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과 몸은 정신과 육체와 대응되는 의미가 아니다. 몸과 마음은 편의상 나뉜 것일 뿐 둘은 본래 하나이다.
우리는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마음의 현상이, 혹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몸의 현상이 몸의 것인지, 마음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이중적이면서 동시에 존재론적이다. 우리 몸은 분명 자연이다. 인간이 언어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 p.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