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합치의 개념은 안착된 합치를 해체할 때 새로운 가능성들이 출현할 수 있는 방식을 사유하는 사명을 지닙니다. 이는 단절, 창조, 나아가 혁명의 거대한 신화에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한 예술가는 예술로 인정된 예술로부터, 더욱이 자기 스스로 이미 작품으로서 창출한 것으로부터 탈합치할 때 비로소 예술가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상가는 이미 사유된 것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스스로 이미 사유한 것으로부터 탈합치할 때 비로소 사상가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은 매우 많은 실천 영역에 적용됩니다. 역사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를 다시 여는 것은 사회에 부과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그 확정성에 매몰되는 적합성과 조정의 형태를 해체할 때 가능합니다.
---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그러나 삶에서 합치가 불가능하다면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이에 대해 절망해야 하는가? 혹은 산다는 것이야말로 도리어 항상 탈합치하려는 역량이 아니겠는가?
--- p.39
능동적인 방식으로, 따라서 결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합치하려면 우선 탈합치해야 한다는 점이 「요한복음」의 논리적 핵심이며 이로부터 그 역설이 이해된다. 그리고 이는 우선 요한의 유일한 성찰 대상은 아닐지라도 그 핵심 대상인 ‘삶’의 현상 자체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잘 알려져 있듯이 삶을 실질적으로 전개할 수 있으려면 삶에서 탈합치해야 하며, 바로 이것이 ‘삶’의 고유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삶을 사랑하는 자는 삶을 잃을 것이며” 자기 삶에 집착하고 그에 함몰되어 그로부터 이탈할 줄 모르는 자는 살아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요한이 간파했듯 삶은 그 원리에 있어서 탈합치이며, 결과적으로 그는 이를 주체의 삶의 규칙으로 삼는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삶을 미워하는 자”, 즉 그런 삶과 탈합치하기로 선택하는 자는 “자기 삶을 영원한 삶으로 보존할 것이고”, 달리 말하면 삶을 단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숨을 의미하는 혼(pusche)이 아니라 생생한 삶(zoe)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런 말도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삶을 다시 얻도록 삶을 내려놓게 하기 위함이다.” 자아와의, 그리고 자기 삶과의 탈합치는 자기 삶을 전개한다는 목적의 수단으로서 명시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의 제자들과 함께할 때도 그들에 대한 열린 탈합치, 그들과의 간극(떠남)은 관계를 강도 있게 하며 관계를 미래로 열어놓는다.
--- p.59-60
탈합치는 기원적 구도를 요구하지도 않고 그 정합성을 특권화된 시각에 고정시키지도 않은 채 기원적 가능성의 조건을 묘사한다. 따라서 탈합치는 이념적 틀에서 면제되고 그리하여 실효적인 과정에 가장 가까이 머물면서 기원적 가능성의 조건을 묘사한다.
--- p.62
예를 들어 내가 오늘 오후에 샹젤리제 극장에서 〈파이드라〉를 연기하는 베르마(Berma)의 재능을 자각하려 시도한다고 해보자. 이 공연은 내가 아주 오랫동안 기대해온 것이다. 게다가 현전하는 이 현재를 분리시키고 부각하기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어둠에 잠긴 관객석, 조명이 밝혀진 무대, 모두의 기다림, 마침내 울리는 세 번의 신호, 그리고 시작을 알리는 침묵……. 그러나 매우 잘 세팅되고 선택된 지금 이곳에도 ‘대상’으로서 내가 실질적으로 합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없다. 그토록 찬양받는 여배우의 연기의 매력을 바로 그 자리에서 자각하도록 해줄 나의 기쁨조차도, 이 기쁨이 퇴색될지 모른다는 염려가 없지 않은 가운데 내가 기다리던 때와 같은 이전의 것이다. 또는 열렬한 첫번째 박수가 대중의 인정을 입증함으로써 이 기쁨을 소급하여 정당화할 때와 같은 나중의 것이다. (···) 현전은 우리가 것을 고정시키려 할 때 숙명적으로 분열되고 풀어헤쳐지며 붕괴된다. 이는 주의력 결여 때문도 아니고 지각의 결함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극장에서 현전이 재현될 때조차도 현전은 현재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전이 실질적으로 느껴지고 체험되기 시작하는 것은 오직 회고적으로 매개를 통해서일 뿐이다. 예를들어 다음과 같은 모순을 통해서다. 상연된 공연에 대해 나는 어느 정도 실망하는 동시에 그것이 이미 끝난 것을 아쉬워한다. 나아가 이 ‘즉각적’ 현전은 역설적으로 거리를 두고 모호하게만 마주칠 수 있거나 프루스트가 결론 내리듯이 오직 아우라를 통해서처럼 마주칠 수 있다. 동시에 여기에는 주체로부터의 자기암시가 일정 부분 섞일 위험이 상존한다. “내가 박수를 칠수록 내게는 베르마가 연기를 더 잘하는 것 같아 보였다.”
--- p.70-72
탈합치는 탐험이다. 탈합치는 우발적인 것, 창조적인 것, 미리 예견되거나 내포되지 않은 것, 개시될 수도 있고 불발될 수도 있는 것을 향해 열려 있다.
--- p.91
우리는 삶에 필수적인 우리의 조건에 부응하고 우리의 힘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만족시키는 것을 진실로 간주한다. 우리가 인식의 객관성이라고 ‘믿는’ 것은 종(種)의 유기체적 필요에 적응하는 것에 불과하다. 심지어 진리가 더이상 진리가 아니라 ‘가치’이며 어쩌면 오류이기까지 하지만 우리의 생존을 위해 유용하다는 점에서 정당화되는 오류라고 할 정도다.
--- p.130
근대 회화가 그 정도로 창조적일 수 있었고 위험을 무릅쓰며 모험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선행 회화와 탈결속하고 (‘자연’과의) 적합성을 해체하는 데 엄격한 노력을 기울일 줄 알았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적합성은 선행 회화를 지원하고 강화했던 적합성이다. 창조성은 그것이 어떤 기적에서 비롯되는지 확인되지 않는 선언된 자유로부터 온다기보다, 확립된 정합성에 대한 간극이 곧이어 그 자체로 활성적이라고 할 때 이런 정합성에 도입된 분란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실제로 ‘근대 회화’라고 불리는 회화의 출현은 사유에서 중대한 사건이다. 적어도 근대 회화를 인상주의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인상주의는 순간의 또는 ‘인상’의 합치를 감지하기 힘들게 정점에 이르게 하며, 동시에 모든 ‘정점’의 고유한 점이 그렇듯이 이미 다른 것을 향하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근대 회화가 그림과 ‘실재’ 사이의 합치에 저항하고 사람들이 숨기고자 한 그것의 우발적이며 따라서 자의적인 특성에 의혹을 품는다면, 이는 근대 회화 또한 나름의 방식대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실행함으로써 이 ‘실재’가 회화 예술을 따르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회화는 의도적으로 탈규범화하고 “매우 잘못” 그린다.
--- p.139-140
모순이 막혀버릴 때 유일하게 가동하는 것은 힘의 관계뿐이다.
--- p.156
예술가가 계속해서 예술가로 남는 것은 자신이 이미 이룬 것으로부터 탈합치할 줄 알고, 자신의 성공을 부정적으로 느끼기 시작하며, 이미 이룬 자기 작품과 간극을 벌림으로써 거기서 자기 작품을 다시 가동할 긴장을 발견할 때뿐이다.
--- p.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