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주제는 우선, 노동과 휴식의 정상적 연쇄에서 떨어져나온 이 밤들의 역사다. 불가능한 것이 준비되고 꿈꿔지고 이미 체험되는, 말하자면, 정상적 사태 진행이 감지되기 어렵고 공격적이지 않게 중단되는 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을 사유의 특전을 누려온 이들에게 종속시키는 전래의 위계를 유예시키는 밤. 공부의 밤, 도취의 밤.
--- p.10
프롤레타리아들의 이러한 밤들의 역사는 인민적이고 평민적이며 프롤레타리아적인 순수성의 보존을 근심하고 집착하는 것에 관해 정확히 다음과 같은 심문을 불러일으키고 싶을 것이다. 왜 학문의 사유 또는 투사의 사유는 그것의 “인민적” 대상의 자기의식과 자기동일성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곤란하게 만드는 그림자와 불투명함을, 어떤 불길한 제3자?프티부르주아, 이데올로그, 또는 주인-사상가?에게 뒤집어씌우기를 언제나 필요로 하는가?
--- p.13
이 역설에서 해방의 도정들의 허영을 인지했다고 너무 빨리 기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자가 열광해야 마땅하나 그리할 수 없는 자기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시초 질문의 반복을 여기서 더 유의미하게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점유자들이 도주하기만을 꿈꾸는 중심을 축으로 세계를 재건하려는 기이한 시도 안에서 작동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도정들 위에서, 프롤레타리아적 실존의 모든 속박을 가로질러 사물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 비동의를 견지하려는 긴장 안에서 타자의 것이 획득되지 않는가?
--- p.15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어. 하지만 가난은 특전을, 심지어 살아가기 위해 이런저런 고역을 택하는 특전조차 갖지 못해.” 문제는 나태할 권리가 아니라 다른 노동의 꿈이다. 반들반들한 표면 위에서 천천히 응시하며 아주 부드럽게 손동작하는 노동이다.
--- p.25
발설된 말의 수다스러움은 실격시켜버리고 들리지 않는 말의 침묵하는 설득력은 선호하는 이러한 경향의 회피는 무엇을 뜻하는가? 인민 신체의 침묵하는 진리에 대한 이러한 매혹에는, 노동자들?대중, 인민, 평민……?이 매우 행복하게 실천하면서 타인들에게는 의식의 파열과 표상의 신기루를 남겨주는 다른 문화에 대한 이러한 환기에는, 모종의 책략이 작동하지 않는가?
--- p.30
노동자로서의 자기 임무를, 세상의 절반은 무위도식하기 때문에 실은 둘의 노동인 이 임무를 완수한 이가 시인으로서의 사도직을 완수할 수는 없다는 점을 빅토르 위고 씨는 잘 안다.
--- p.33
사실 노동자들이 말을 한다면 이렇게 말하기 위함이다. 자신들에게는 밤이 없다고. 왜냐하면 밤이란 낮의 노동에 질서를 부과하는 자들에게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말을 한다면 이는 자신들이 욕망하는 밤을 얻기 위함이다. 저들의 밤?목수 고니가 “잠만 처자게 하는” 밤이 다가온다고 했던 그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외양의 왕국인 우리의 밤을. 잠자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는 자들에게 남겨진 그 왕국을.
--- p.36
착취로부터 계급의 발화로, 노동자 정체성으로부터 집단적 표현으로 곧장 뻗은 길이라 여겨지는 곳에서 이러한 우회를 거쳐야만 한다. 이 혼종적 무대에서 프롤레타리아들은 자신들을 만나러 떠나왔고 종종 자신들의 역할을 전유하길 욕망하는 지식인들과 공모하여 위로부터의 말과 이론으로 시도해보고, 누가 타자를 위해 말할 권리를 갖는지 정의하는 낡은 신화를 재연하고 전위한다.
--- p.45
섬기다와 살아가다, 이 두 단어를 똑같이 경멸하는 투로 강조하는 재단사 베르토에게는 섬김이 죽음 앞에서의 공포와 맺는 관계를 가르쳐줄 그 어떤 철학자도 필요치 않다.
--- p.61
낯선 집단적 운명에 대한 상상?착취자 없는 부르주아 문명, 영주들이 없는 기사도, 주인도 하인도 없는 주인다움?에 달려 있는 개인적 모험. 요컨대 노동자들의 해방이라는 그 상상.
--- p.76
또하나의 병, 그것은 목수의 달뜬 예상이 아니라, “매분마다 신에게 구걸하는” 어떤 삶의 느린 임종 안에서, 닫히거나 비어 있고 또는 침체해 있는 작업장의 문을 두드리러 가는 흐름 안에서, 영혼의 고통과 신체의 고통의 동일한 영속적 교환이다.
--- p.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