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역, 귀갓길에
1947년 9월 1일, 월요일
사랑하는 캐시,
토요일과 일요일에 당신에게 편지를 쓰지 못했습니다. 토요일 오전에 친척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오후에 편지쓰기를 끝내면 당신에게도 쓰려고 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내게 웅변대회의 심사를 부탁하고 이어서 테니스 경기에도 참여해야 한다고 졸랐습니다. 그 일로 낮잠 시간까지 빼앗겼습니다. 낮잠은 요즘 같이 쉴 새 없이 일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때는 거의 필수적인 일입니다. 배탈이 난 이유 중 하나가 설교하고 가르치며(특별히 많은 군중 앞에서) 계속 긴장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웅변대회는 아주 좋았습니다. 꽤 다양하기도 했습니다. 누가 2등인지에 관해서는 심사위원들이 의견을 모았고 더욱이 가장 하위 득점의 두 사람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그다음 심사부터는 상이한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한국인들은 비교적 좋은 테니스 실력과 훌륭한 스포츠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이처럼 부드러운 고무공으로 서브를 넣는 것이 서툴렀지만, “좋은 폼”을 보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두 번의 서브 기회 때 한공도 네트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토요일 저녁 예배 후에는 이어서 아주 특별한 음악회가 열려 초만원을 이룬 청중을 매료시켰습니다. 모든 집회를 주의 깊게 기록하는 사람에 의하면, 그 집회에 1,029명이 참석했고, 뜰에서 약 500명이 확성기로 들었습니다.
일요일에도 역시 바빴습니다. 오전에 예배 전에 방문자들을 맞았습니다. 오후에는 물론 낮잠을 잤습니다. 그 후에 세 번 심방을 했습니다. 그중 하나로, 우리는 몸이 아픈 젊은 변호사를 심방했는데, 교회에 다니는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방문해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는 교회에 다녔지만, 지금은 모든 것에 대해 냉소적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픈 동안에 그는 신약성경을 읽었고, 우리가 방문했을 때 다소 부드럽게 대하는 듯했습니다. 나는 신학교 설립자이자 거창교회의 담임목사인 주[남선] 목사와 주 목사의 동역자인 젊은 전 목사와 함께 갔습니다.
그 후에는 그 지방에서 유명한 한국인 한 명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나이든 학자이자 구한국 정부의 관리였습니다. 그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받은 주 목사를 크게 존경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각별한 요청을 받고 그곳에 갔습니다. 그는 노인이지만 머리가 좋고 예리하며 대단히 지적으로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색이 깊은 사람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아직 유교를 매우 좋게 여기고 있는 것 같지만, 유교가 타락해서 생명력을 잃어 형식만 남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한국을 구해줄 수 없으며 한국이 그리스도에게 귀의해야만 이 나라를 위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그가 한 말의 신실성을 보여주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늙어서 교회에 가기가 쉽지 않은 줄을 알지만(그는 집회에 참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진해서 그와 함께 가족을 그리스도께로 데리고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가 매우 진실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아직 조상 제사를 죄로 믿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에게는 그것이 제사라기보다는 기념에 더 가까웠습니다. 나는 그에게 조상 제사는 죄가 된다고 말했고, 그런 다음 그가 알고 있는 죄를 고백해야 하고 하나님께 모든 죄를 낱낱이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죄를 씻어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믿음을 주시도록 요청하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성경을 읽기 시작하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목사가 순 한문으로 된 성경을 그가 좋아하지 않을는지 물었습니다. 그의 눈이 밝게 빛나며, “그런 것이 있나요? 그것이 ‘뜻을 담은 글’ 이어서 나는 그것을 ‘보통 글’(표음문자)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목사는 그에게 그런 성경을 가져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원로 목사가, “이제 당신은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하니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십시오. 헌트 목사가 기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머리를 숙여 기도했습니다.
일군의 사람들, 곧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밖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나오자, 그곳에 서서 흥미에 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습니다. 그들이 그의 아내와 딸들인지, 아니면 하녀들 혹은 이웃 여자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후 우리는 한 젊은 사업가를 만나러 병원에 갔습니다. 그는 최근에 결핵에 걸렸으며 집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되어 크게 낙심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방문했을 때 그가 집회들을 얼마나 열심히 따라다니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노방전도 행렬이 가까이 지나갈 때 너무 감동해서 실제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습니다. 군중들이 교회로 오가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에게서 각 집회에서 어떤 것을 얻었다고 증거하는 이야기들을 건네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1947년 9월 2일, 화요일
나는 위에서 말한 이야기들을 대부분 김천에서 해방호 한국 기차를 기다리며 썼습니다. 어제 오전에 혼잡이 심한 버스를 탔는데, 그 와중에 등이 심하게 뒤틀렸습니다. 사람들이 붐비는 역에서 오래 기다리다가 나는 거기서 관심 있어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할 기회를 얻어 사람들을 모았는데, 마침내 기차가 도착했습니다. 나는 한국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에 관심 있어 하는 몇 사람을 만났습니다. 나는 이에 대해서는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가던 중에 엔진을 구동장치에 연결하는 막대가 부러졌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지푸라기 새끼줄로 묶고 대구까지 느릿느릿 움직여 나아가서 한 시간 반을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 일로 YFC Youth For Christ집회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나는 여기 우체국에 왔습니다. 당신의 편지가 10통이 왔고, 다른 편지가 8통이 왔습니다. 이곳에 온 기독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에 속한 청년 한 명이 칼빈신학교의 이준호를 위해 후원을 받으려고 애쓰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개봉한 유일한 편지입니다. 우체국 직원은 내게 사무실이 구호품 소포들로 가득 차 거의 들어갈 틈이 없을 지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내게 그것들을 가리키며, 일본인 2세 미군과 결혼하는 한국 여자가 미국식으로 옷을 갖춰 입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나는 그 일이 합법적일 것이라고 믿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여자가 새로운 조국인 미국을 위해 준비되도록 그녀를 도울 의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브루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