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중에서 가장 혁혁한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시간혁명’이라고 한다. 기계시계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고, 정확한 기계시계의 발명은 시간의 개념 자체를 크게 바꾸었다. 그와 함께 시간의 측정에 바탕을 둔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생겨났다. 그에 따른 사고의 변화는 근대적 사고, 합리적 사고로 나타났다.
---「책을 내면서」중에서
시간은 인간이 ‘발명’한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정해 놓은 것일 뿐이다. 과거와 현재라는 것도 모두 임의로 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시간을 통제하려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시간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커졌고, 그래서 시계를 만들었고 시간을 손에 쥐려 하였다. 하지만 시간은 그저 뒤에서 앞으로 흐른다. 이를 되돌리지 못한다. 4차원 시간은 아직까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저 수동적으로 그 흐름을 관찰만 할 뿐이다. 인간이 만든 시간이라 그런지 시간은 매우 인간적이다. 시간은 나기도 하고 내기도 한다. 시간은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하고 남기도 한다. 아끼기도 하고 그냥 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시간은 금이기도 하고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기도 하다.
---「시간이란 무엇인가?」중에서
기계시계란 자연의 주기가 아니라, 동력으로 발생하는 인위적 주기를 활용하는 것이다. 즉 동력을 이용하여 움직이게 함으로써 일정한 간격으로 시간을 균등하게 잴 수 있는 기계장치를 말한다. 물시계와 기계시계의 근본적 차이는, 물시계가 물항아리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의 양을 재는 계속적 과정으로 시간을 측정한다면, 기계시계는 시간을 특정 단위로 나누어 반복적으로 기계적 동작[진동]을 하게 하여 시간을 측정한다. 기계시계는 1280~1300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 아쉽게도 누가, 언제 이를 발명했는지는 모른다.
---「자연의 시계에서 기계시계로」중에서
수정시계가 나오면서 게임은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시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더욱 놀라운 신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슘원자시계(Cesium atomic Clock)였다. '원자시계'는 원자에서 내보내는 파장이나 공명을 진동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하루의 길이는 연간 평균으로 따져 보면 약 1밀리세컨드 정도의 변폭이 있다. 따라서 1952년부터 지구의 자전 대신 1년의 길이, 즉 지구의 공전에 바탕을 둔 역표시(ephemeris time, 曆表示)를 쓰게 되었다. 이는 100년에 0.5초 정도의 오차가 나는데, 초정밀이란 관점에서 보면 이마저도 흡족한 것은 아니었다. 초정밀 시간 측정에 대한 필요성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제 천문관측에 의해 얻어지는 시간보다 더 정밀한 근본적인 표준시간을 찾아야 했다. 이러한 기준은 원자나 분자 진동이 발진發振하는 특정 스펙트럼선의 주파수를 측정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시간 측정의 기준이 바뀐다」중에서
조선은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독자적인 역법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역서의 ‘자주성’을 부각시키기는 어렵다. 하지만 실제로 조선은 국가로 존속하는 내내 한 차례도 역서의 반포를 거른 적이 없었고, 하루라도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백성에게 알리는 역서의 반포와 보시 제도는 중국이 아닌, 조선 기준의 연월일시였다. 이처럼 조선은 자신의 시간 규범을 수립하고 이를 백성에게 제공해왔다. 그리고 그 역서를 본국력, 아국력我國曆 또는 향력 등으로 불렀다. 이는 다만 명분 때문에 역법의 이름을 따로 붙이지 못했을 뿐이지 사실상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역법이나 마찬가지였다.
---「본국력은 ‘우리만의 역서’」중에서
이 때문에 조선 천문학의 역사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려 한다면, 그건 하루 안의 시간 측정, 즉 ‘시계’의 영역이 수월했다. 따라서 독창성은 시계에서 나왔다. 달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칠정산내편』에서 다른 모든 내용은 중국의 것을 답습하면서도 한양을 기준으로 한 일출입 시각과 주야각을 실어둔 것도 그것이 하루 안의 시간에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칠정산내편』을 독자적인 본국력으로 평가받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정확한 시간이 필요했을까? 시간을 정확히 안다는 게 왜 필요했을까? 행동의 동시성도 어느 정도 필요했을 것이지만, 그보다는 운세, 의례 그리고 농시 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공중公衆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중에서
1536년(중종 31) 보루각을 다시 만들면서 논의되었던 말들을 보면, 자격루에 담겨 있는 ‘자격’의 창조성과 경천근민의 정신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루각이 새로 만들어지자 중종이 “내가 어찌 보고 싶지 않겠는가?”라 하여 친히 찾아보기로 하였다. 이에 영상과 좌상인 김근사와 김안로가 아뢰기를 “세종께서 거룩한 슬기로 특별히 창작하신 것으로, 만든 의도는 옛 조상들의 뜻과 같지만 그 방법의 신묘함은 어느 때보다 훌륭하였습니다. 이것은 시간만을 편리하게 알려줄 뿐 아니라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다는 의의도 내포되어 있으니 참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에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옛 제도가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와전되어 진실을 잃을까 두려워서 다시 새 보루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거룩하신 세종께서 만드신 제도의 오묘함을 후세에 길이 전하는 것이 바로 그 뜻을 이어받고 발전시키는 참뜻입니다.”라 하였다. “저절로 울려서 시간을 알리는 제도”, 즉 자격루는 세종의 성지聖智로부터 창출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보루각을 다시 만든 것은 바로 그 뜻을 잇고자 하는 데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세종이 자격루를 만든 까닭은?」중에서
이처럼 흠경각 옥루의 창의적 핵심은 바로 혼천의와 물시계를 융합하고 거기에 자동시보장치를 덧붙인 것이었다. 쇠구슬을 사용하여 인형을 작동하는 자격루의 장치는 흠경각 옥루에도 전승되었다. 게다가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였다. 말하자면 천체의 운행을 재현해 주는 천체 모형을 만들어 놓은 천상시계였던 것이다. 결국 옥루는 자격루보다 한 걸음 더 나간 본격적인 수운혼천시계였던 것이다. 동력을 얻는 방식도 보루각 자격루의 수루식과는 달리 수차를 이용한 수격식을 적용하였다. 1435년(동 17) 경에 완성되고 구동 중이던 것을 1438년 흠경각에 간의대 수운혼천의 제도를 업그레이드하여 옥루라는 형태로 구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의성의 집합, 조선의 천문시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