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엄마는 그만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아기한테 들어가는 돈 … 한 달에 40만 원. 분유, 기저귀, 물티슈를 비롯한 고정 지출부터, 어린 모녀의 생계를 위해 필요한 돈이 40만 원이란다. 고작 그 돈이 없어서 그런 거였다. 40만 원이 없어서 아기는 매일 밤 혼자 잠을 자야 했고, 그 돈이 없어서 어린 엄마는 아기를 일찍 재워야만 했다. 원룸의 문을 잠그고, 가기 싫었던 술집으로 가야 했고, 커가는 아기를 보면서 어린 엄마는 그 40만 원을 원망하며, 다시 화장을 했을 것이다.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내가 줄게, 40만 원. 매달 줄 테니까 일하지 마!”
아무 생각 없이 툭 이런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나는 다 좋은데, 가끔 이렇게 ‘가오’가 ‘정신’을 지배할 때가 문제다.
--- p.29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어쩌면 마음이 복잡했다기보다, 명분을 찾고 싶어 했던 나에게 주희는 하나의 이유가 되어주었다. 엊그제 열몇 통의 전화, 그리고 오늘 또 몇 통의 전화. 나에게는 모르는 사람 여럿, 도움이 필요한 사람 몇 명의 전화였지만, 사실 맘카페에 가입된 수많은 사람들이라 생각했지만, 그 사람들에게 나는 손을 내밀어줄 단 한 사람이었다.
하나, 한 사람이라는 단어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하나, 둘, 셋, 숫자가 점진적으로 증가할 때는 왜인지 희망이 생기지만, 셋, 둘, 하나로 줄어들수록 아쉬움이 커진다. 그것이 사람이라면 더 그러하듯, 나에게 한 사람이라는 단어는 꽤 크게 가슴에 닿았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렇다면 주희에게처럼 세상의 마지막 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 p.47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나를 볼 때 몇 가지 오해를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기를 데리고 다니니 당연히 내가 아빠일 것이라는 오해다. 이 오해는 나와 마주 앉아 몇 분만 이야기해보면 금방 풀릴 것이다.
우리 사무실 앞 부대찌개 식당에서는 더 이상한 오해를 받은 적도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매일 다른 아기와 엄마들을 데려오는 나에게 이상한 눈빛을 보내곤 하였다. 젊은 청년이 아기가 있는 것도 신기한데, 그 아기는 매번 바뀐다. 심지어 아기의 엄마도 바뀐다. 거기에 종종 이야기를 하다 울기까지 하는 아기 엄마들도 있으니,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과 눈빛은 매번 밥을 먹는 내 뒤통수를 쏘았다.
하루는 참다못한 아주머니가 “당신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선교사요”라고 답했지만 부대찌개 사장님은 믿지 않았다. 그래서 미혼모를 돕는 NGO 단체 대표 명함을 내밀었더니 깔깔 웃으며 내 등을 퍽퍽 때렸다. 오해는 아주머니가 했는데, 매는 내가 왜 맞는가?
--- p.57
혼인신고를 하던 날, 남자는 새 여자를 만났다.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갔다. 남자는 다혜를 찾아와 뱃속의 아기를 지우자고 설득했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다혜는 미혼모를 위한 쉼터에 들어가 그래도 출산을 준비하려 했다고 한다. 모성애나 생명에 대한 소중함보다 복수심이 더 컸다. 그러나 찾아간 미혼모 시설에서는 엄마들끼리의 텃세에 밀려 쫓겨나게 되었고, 다혜는 당장 생활비와 출산비가 없었다. 단 하루 몸을 눕힐 장소 또한 없으니, 다혜는 단돈 몇만 원이 급했다. 유흥업소에서라도 일을 하고 싶었지만, 그런 곳조차 더러운 행색의 다혜를 써주지 않았다. 결국 다혜는 조건만남과 원조교제 같은 성매매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고작 하루에 몇만 원을 벌어 겨우 하루를 살던 다혜에게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만삭임에도 하루 한 끼 겨우 먹기가 일쑤였고, 배가 불러올수록 성매매를 할 수 없으니 그마저도 못 먹기가 부지기수였다.
--- p.60
“아직 배가 덜 고파봐서 그래.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해.”
아니다.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사는지가 제일 중요하다. 그래야 엄마들의 항해에 어떤 풍파가 와도 ‘씨익’ 다시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현장에 있는 우리가, 혹은 이웃의 누군가가, 친구들이, 어느 공동체가 이들을 향해 맹목적으로 자립을 강조하는 시선만 보내기보다,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 존엄성을 생각할 때, 그때부터 아이들의 얼어붙은 세상 위로 한줄기 봄바람이 불어오지 않을까.
--- p.98
복잡한 생각이 가득 차버린 머리가 아파 정은이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손을 펼쳐 자신의 상황을 헤아려보았다. 하나,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남자친구를 잃었다. 둘, 믿었던 아버지에게 버려졌다. 셋,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넷, 당장 가진 돈도 없다. 손가락을 수차례 쥐었다 폈다. 임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지 아기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잃은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허무함을 넘어선 공허함이 올라왔다. 이내 복잡했던 머리가 정리가 되듯, 이 한 문장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 끝내고 싶다.’
--- p.113
정은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도 없는 모텔에 인기척이 들렸던 것이다.
‘툭-, 툭-.’
멍하니 손목을 바라보던 정은이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향했다. 인기척은 거기서 나고 있었다. 거기서 다시 느낌이 왔다.
‘툭-.’
아랫배 조금 왼쪽에서 느껴지는 물방울 터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작은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발길질을 한 것이었다. 비 쏟아지듯 눈물이 흘렀다.
--- p.115
‘품다’라는 말이 참 좋다. 중의적 표현이라, 그 말에는 품에 ‘감싸안는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고 ‘보호’의 의미가 있을 것이며, ‘사랑’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품다’라는 말을 생각할 때면 나는 노아의 방주가 떠오른다. 방주는 히브리말로 ‘테바’라고 한다. ‘상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바’는 방주를 비롯해 구약성경에서 두 번 나오는데, 나머지 한 곳은 출애굽기의 모세의 갈대상자를 말할 때 나온다. 테바는 구원과 연결된다. 홍수 심판 가운데 방주(테바)를 통해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을 구하셨듯이(히 11:7), 남자아이들의 죽음 가운데서 갈대 상자(테바)를 통해 아기 모세를 구원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롬 8:1). 그래서 ‘테바’는 하나님이 인간을 품으신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창세기에 나온 방주는 나에게도 ‘품다’와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단순히 하나님의 분노와 처벌의 홍수에 집중하기보다, 방주를 끌어안은 하나님의 절박함에 집중해야 한다. 마치 배를 감싸 안고 매질을 견딘 정은이처럼, 그리고 모세만큼은, 이 아이들만큼은 더 껴안으려 더 낮게 웅크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
--- p.131
“내 딸이면 포기 안 하죠! 그런데 쟤는 내 딸 아니잖아요?! 그렇게 급하시면 쟤 부모 찾아서 보내세요! 저는 못 갑니다.”
“그래 효천아, 너 말 잘했다. 걔는 네 딸 아니야. 근데 그 아이는 사랑하는 내 딸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 아이 보고 손가락질해도, 내가 아직 그 아이를 내 딸이라 부르고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저 아이를 외면해도, 내가 아직 기다리고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저 아이를 포기한다 해도, 설령 너마저 포기하였다 해도, 나는 절대 포기 못 해! 아직도 내 딸이라 부르며 기다리고 있다. 그것만 좀, 가서 대신 전해주지 않겠니?”
--- p.218-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