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친구이자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우리를 잘 아시니, 우리 또한 주님을 잘 아는 줄 착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안다는 것은 고작해야 예수님의 출생, 사역, 고난, 죽음, 부활, 승천에 이르는 생애의 과정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거의 암송하는 이도 있고, 예수님 때문에 학위받은 사람도 많습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우리는 주님의 반쪽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았지 그 분의 내면은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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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표현하자면, 그 분이 능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시는 영광스러움만 보았지, 그 분의 아픔과 눈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중풍, 나병, 고창병, 혈루 등 불치, 난치, 희귀병을 고치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이. 듣거나 말하지 못하는 이, 걷지 못하는 이 등 장애를 고쳐 주셨습니다. 흉악한 귀신, 일곱 귀신, 군대 귀신 들린 이를 고치셨습니다. 보리떡 몇 개와 생선 몇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렇게 능력과 기적을 행하신 주님은 이미 지난 이천년 동안 역사에 노출되어 왔고, 수많은 신학자에 의해 그의 사상과 교리가 가르쳐졌고, 많은 설교자들에 의해 그분의 가르침과 삶이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 네 권, 그 제자들의 기록인 한 권의 역사서,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의 열정을 담은 서신 등도 정경에 포함된 것만 스물두권입니다. 모두 스물일곱권의 성경으로도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것만 아니라 더 많은 자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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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성경에 대한 많은 서적들 즉, 성서, 교의, 역사, 실천 신학에 대한 책도 많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선포된 강단 사역자들의 설교를 담은 설교집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엄청난 신학 서적이나 주석이 있고, 매주일 일 년이면 최소 천 번은 외쳤을 설교를 통해서도 주님의 반쪽 밖에는 모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 반쪽이란 예수님의 슬픔이자 외로움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외롭고 슬펐습니다. 이런 일들이 그를 아프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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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로움'이나 '슬픔'처럼 어두운 표현은 인생들처럼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한 염려나 아픔, 혹은 인간관계의 그리움이나 갈등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보니 세상이 질병들이 있음이 안타깝고, 멸망이 다가오는 미래를 보니 그 안에 갇혀있는 이들을 보며 아팠고, 해결하지 못하는 병이나 장애를 바라보면서 그들의 고통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눈으로 이들을 보고, 사랑의 마음으로 이들을 품고, 사랑의 손으로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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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은 영광스런 결과만 보았지, 이를 치료하며 아파하시는 주님의 눈물, 그를 고쳐주고 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안타까움, 기적을 행하시기 이전 주님의 사랑을 쏟아내는 내면의 아픔을 못 보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주님의 능력에 취해서 미처 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외면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이든 사물이든 참 모습은 그의 내면에 있습니다. 존재하는 내면을 해부하고 그 실상을 살펴보지 않으면 우리는 절반의 이해 밖에는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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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접시에 담긴 맛있는 '스테이크' 한쪽이 군침 도는 육즙을 뿜어내며 정갈한 송이 한 쪽과 함께 차마 먹기도 아까운 모습으로 테이블 앞에 놓이기까지 많은 눈물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양질의 사료를 선택하고 소가 평온하게 자라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 한우 농가와 채소 한 포기를 자식처럼 사랑한 농부의 땀 흘림과, 재배하고 출하하여 시장에 보내면 이른 새벽에 시장에 나가 식자재를 준비하고, 다시 주방에서 정성껏 손질하여 접시에 담기까지 또 많은 공이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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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g이 채 안 되는 스테이크 한 쪽을 500kg의 소에서 선별하여 육질의 특성을 살피고 최고의 요리를 만드는데 필요한 화로의 열을 조절하고, 생각 없이 뿌린 듯 보이는 소스 몇 방울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진 음식 예술인줄 알아야 고기의 맛을 음미하며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요리사는 한 점 스테이크를 접시에 올려놓기까지 최소한 십 년에서 몇 십 년을 주방에서 쫓겨나고, 다시 칼을 갈고 눈물을 씹으며 밤을 새워 오늘 스테이크 한 접시를 내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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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들은 예수님의 3년 공생애를 가볍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자 그의 아들이시니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손만 내밀면 기적이 나타나고, 입만 열면 권세가 나타나는 줄 아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전에 30년 세월을 평범한 가정에 오셔서 성장하며 목수 일을 배우고 당시 갈릴리의 일반적인 직업인 어부들을 찾아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애환을 온 몸으로 느끼며 그 안에서 녹아진 사랑으로 무리들을 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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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강단만 쳐다보며 '아멘!' 하면서, 오만 가지 맛을 내며 선포되는 설교 한 편을 만들기 위해 날밤을 하얗게 새우며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의 외로움을 모릅니다. 매일 난생 처음 하듯 수많은 책을 뒤지고 기도하며, 썼다가는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며 피 말리는 설교자의 아픔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 고뇌에 찬 밤과 시간이 지나면 입이 써서 밥도 못 먹을 만큼 속이 타고 가슴 졸임을 아는 사람만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평론가가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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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아름다운 사랑을 해보거나 자녀를 낳고 기르며 웃음꽃을 피워본 적이 없습니다. 생일 축하 한 번 받아본 적도, 맛 집을 찾아 제자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잡수어 본 적도 없으십니다. 그걸 세속적인 즐거움이자 행복이라고 치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님이 마음 편히 두 다리 뻗고 하룻밤을 주무신 적도 없습니다. 늘 목숨에 위협을 받으셨고, 능력을 행하실 때마다 시비하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주님의 대척점에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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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분명히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무능한 범인(凡人)으로 사셨습니다. 모든 이들의 죄를 씻어주실 구속(救贖)과 치유의 능력이 있으신데, 죄인처럼 비난받고 쫓기고 끝내 죄인으로 죽으십니다. 그래서 외로운 분이십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신 대로 죄인을 위해 죽으셨지만, 주님은 당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한 사람의 친구도 없이, 누구도 그의 친구로 남아있지 않은 외로운 길을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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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나 동고동락한 제자들 중에 주님을 위해 '빌라도'나 '헤롯'에게 저항하다 잡혀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요즘처럼 '1인 시위'라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죽으실 때 함께 처형당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외로웠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나 무리들을 의지할 마음은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말씀을 전하면 이해할 줄 알고, 기도를 요청할 때 함께 기도해 주었으면 했지만, 이런 주님의 기대와 요구를 충족시켜 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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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예수님을 모셔다 임금을 삼으려고 할 때도, 어리석은 그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는 무리들을 보며, 며칠 앞으로 다가온 자신의 죽음도 모르고 영접하는 것이 답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달려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죽으실 때, 그곳에는 그동안 주님께서 살려준 이들, 질병에서 고쳐준 이들, 귀신에게서 놓임 받게 해 준 이들이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느 누구도 주님의 고난을 보며 흐느끼며 엎드려 우는 이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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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외람되게도 주님이 오신지 2천년 만에 '외로운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혼자 많이 울었습니다. 많이 외로워하고 슬퍼하며 주님의 삶을 저의 의식 속에서 경험하느라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분노하면서 지났지만, 그 때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속적이고 자극적인 삶에만 연연했지, 예수님의 깊고 그윽한 사랑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제 그런 저의 허물을 벗기 원합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