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치과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자면서 치아를 무려 16개나 뽑자고 제안했다. 당시에 임플란트라는 혁명적인 기술이 처음 나왔는데 나를 실험 대상으로 하고 싶어 했다(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내 잇몸은 유난히 약해 당시 기술로는 임플란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날 집으로 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부모님을 원망하고 하나님도 원망했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요한복음 9장에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젊은이가 나온다. 그가 가진 문제는 부모의 죄도 자신의 죄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뜨고 나서야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셨음을’ 깨달았다. 나 역시 어렸을 때는 고통과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담긴 선물의 진정한 모습, 그 큰 그림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작은 상처와 약점에 함몰되어 살지 말고 이것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조망해야 한다. (…) 문제는 이런 고난을 만났을 때 누구나 큰 그림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그래서 큰 그림을 보려면 육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전체 풍경을 보려면 높은 고지에 올라야 하듯,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을 보려면 영적으로 높은 고지에 올라가야 한다.
--- p.47~49
이 글을 쓰는 요즘, 나는 매일 밤 히브리어 성경으로 시편을 몇 편씩 읽고 잔다. 이전에는 몰랐던 감정과 느낌이 전해져 오면서 ‘시편을 쓴 저자는 어떤 상황과 아픔에서 이 기도를 시작했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짓곤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극심한 고통과 아픔에 대한 호소나 탄원으로 시편이 시작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갑자기 찬양과 감사와 기대로 바뀐다는 사실이다(지금 당장 시편 아무 곳이나 읽어보라). 어떻게 이런 갑작스러운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분명히 그 사이에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르래가 힘의 방향을 바꾸어놓듯 기도가 중간에서 고난을 찬양으로 바꾼 것이다. 시편이라는 기도의 흐름이 그런 위대한 일을 한다.
--- p.79
변화가 없는 성도에게는 한결같은 특징이 있다. 고난을 견디는 인내가 부족하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태도가 잡혀 있지 않다. 그들은 예배, 기도, 말씀, 훈련 그리고 증인의 삶(전도)을 지속하지 않는다. 환경과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믿음을 버리고, 나중에 핑계를 댄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자면, 신실하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니며 인내를 통과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둘 다 탄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바로 밀도에서 차이가 난다. 영적으로 말하면 ‘누가 얼마나 지속해서 인내했는가?’에 있다. 인내는 작은 씨앗 같지만, 그 열매는 실로 위대하다. 실제로 교회에서는 신실한 성도 한 명이 천 명의 불성실한 성도보다 더 귀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비밀이 있고 변화와 성장을 넘어 위대한 감격이 있다.
--- p.93~94
순간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상황에서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마음속 깊이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처럼 사는 것이 너무나 힘겨웠기에 나는 눈물로 기도했다. 성결대학교 기도실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교회에서 기도하고, 집에서도 밤마다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를 마칠 때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환경을 이기라.”
그래서 나는 주님께 여쭈었다.
“어떻게 환경을 이깁니까?”
그러자 그분이 이어 말씀하셨다.
“감정을 이기는 것이 환경을 이기는 것이다.”
환경이라는 것, 상황이라는 것이 결국 나의 감정에서 출발하니까 주님 말씀이 맞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오기가 생겨서 계속 여쭈었다.
“그러면 감정은 어떻게 이깁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놀라운 해결책을 제시해주셨다.
“감사하라!”
솔직히 처음에는 신경질이 났다. 일이 잘되거나 잘될 기미라도 보여야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다 아시고 해결될 기미는 전혀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감사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감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감사’라는 영적 신비의 바다에 담긴 그 엄청나게 넓고 깊은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저 해변의 찰랑거리는 물결만 만지고 놀았던 것이다.
--- p.113~114
십자가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누군가 교회 문이 부서지라 두들기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일단 조심하려고 바로 나가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어떤 걸인이 술에 잔뜩 취해 욕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몇 푼 구걸하려고 왔는데, 교회 문이 열리지 않자 화풀이를 시작했던 것 같다. 그는 한국 교회와 목사들을 향해 평소 들어왔던 좋지 않은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면서 한참 동안 욕설을 내뱉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나에게 그를 만날 용기를 주셨다. 막상 내가 문을 열고 나가니 그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교회 안에 아무도 없다로 생각하고 엄청난 욕설을 퍼부었는데, 내가 그것을 안에서 다 들었다고 생각하니 순간 당황한 것 같았다. (…)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특별한 은사가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다. 눈과 코와 귀가 금방 감지하기 때문이다. 길에서 노숙하면서 사람들이 배달시켜 먹고 남긴 음식을 먹는 이들의 외모와 냄새와 태도는 정말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 역시 지독한 냄새를 풍겼지만, 하나님은 내 안에 다른 마음을 부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마음으로 그 걸인에게 긍휼을 베풀기로 했다. 나는 먼저 그를 교회 화장실로 데려가 몸을 씻겨준 다음, 이전에 입었던 옷을 다시 입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 같아서 내 옷을 꺼내 주었다. 비록 내가 신던 것이지만 신발도 주었고, 그때 주머니에 있던 돈을 전부 주었다.
--- p.138~139
결혼을 하고 2년쯤 지났을 때였다. 지금 돌아보면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날 내 입에서는 땅의 지혜에서 출발한 사망의 언어가 튀어나와 아내를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선전 포고를 한 셈이다. 그런데 아내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보, 만약 제가 그 말에 당신과 똑같이 대답한다면, 당신은 화가 나서 더 심한 말을 하겠지요? 그러면 저도 그 말을 받아서 더 독한 말을 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지난 시간 서로 존중하고 사랑했던 시간이 파괴되지 않을까요?” 순간 나는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고, 아내에게 나의 경솔함을 사과했다. 나는 그날 아내가 한 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아내의 입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아닌 아내가 설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p.174
시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조급하다. 시간을 지배하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살기 때문이다. 항상 급한 일만 처리하다 보면 중요한 일을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성도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중요한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급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이 말을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뜻이다. “급한 일만 하다 보면 중요한 일을 할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이 시간과 때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이다. 습관은 영성이고, 인생의 열매는 시간을 보낸 삶의 습관과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지만, 당신께서 허락하신 시간 속에서는 곧바로 서 있는 자와 함께하신다.
---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