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에베소서를 주의 깊게 읽고 나면 그 누구도 개인화된 복음을 주장할 수 없다. 에베소서는 교회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말한다. 그 새로운 사회는 칙칙한 옛 세계를 배경으로 밝고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가 갖는 특징은 죽음 대신 생명, 분열과 소외 대신 연합과 화해, 악한 부패 대신 건전한 의의 기준, 미움과 다툼 대신 사랑과 평화, 무기력한 악과의 타협 대신 악과의 간단없는 투쟁 등이기 때문이다.
--- 「저자 서문」 중에서
‘은혜’와 ‘평강’은 에베소서의 핵심 단어다. 6:15은 복음을 “평안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2:14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화평”이라고 나온다. 먼저 그분이 자신의 십자가로 “화목하게” 하고, 그다음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똑같이 “오셔서 평안을 전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의 백성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다른 한편, ‘은혜’는 왜 어떻게 하나님이 화목의 주도권을 쥐셨는지 보여준다. ‘은혜’는 값없이 과분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기 때문이다.
--- 「서론 저자, 수신자, 메시지」 중에서
하지만 그런 기독교적 담화는 사람 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상의 성향과 격렬히 충돌한다. 자신의 하찮은 자아에 갇혀 있는 타락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가 지닌 힘을 거의 무한히 확신하고, 거의 만족할 줄 모르고 자신의 영광을 찬미하기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적어도 그것을 뒤집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이상을 가지고 있다.
--- 「1장 모든 신령한 복」 중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거룩함으로, 자유와 평강으로, 고난과 영광으로 부르셨다. 좀더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삶,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기며,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서로서로 교제를 나누고, 현재 당하는 고난을 넘어 언젠가 나타나게 될 영광을 바라보는 그런 삶으로의 부르심이다. 이것이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다.
--- 「2장 지식을 구하는 기도」 중에서
바울은 인간의 타락에 대해 전혀 환상이 있지 않았다. 그는 상황 무마를 거부했다. 그렇게 되면 피상적인 해결책을 제안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세 가지 무서운 능력인 ‘죄’, ‘사망’, ‘진노’에 매여 있는 사람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이 단락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는 것도 거부한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유일한 소망이 부활인 것은 사실이다.
--- 「3장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 중에서
예수님이 막힌 담을 허무신 단 하나의 인간 공동체 안에 감히 어떻게 우리가 그 막힌 담을 다시 세우는가? 물론 외부 세계에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있으며, 새로 회심한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있을 때, 즉 자신이 언제나 하듯이 말하고 옷 입고 먹고 마시고 행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더 편안하게 느낀다. 하지만 교회 내에서 이런 담들을 의도적으로 영속화하는 것, 그리고 심지어…그런 담들을 극복하려는 적극적 조처를 전혀 취하지 않고 묵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에 대항하는 것이며 심지어 그것을 망쳐 버리려 애쓰는 것이다.
--- 「4장 단 하나의 새로운 인류」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견해와는 반대로, 역사(history)가 ‘그분의 이야기’(his story), 곧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영원부터 품으신 계획으로부터, 역사 안에서 절정으로, 그리고 그것을 넘어 미래의 또 다른 영원으로 이어지면서, 역사적 성취와 드러냄을 통해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같이 시간을 직선적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역사적 계획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구속받고 화목하게 된 그분의 백성이라고 말한다.
--- 「5장 바울의 독특한 특권」 중에서
교회가 정확히 어떻게 성숙에 이르도록 자라는지 묻는다면, 바울은 즉시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진리와 사랑에 의해 자란다.…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그 둘을 균형 있게 결합하라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라는 그의 표현에 대한 최선의 번역이 아니다. 헬라어 동사는 우리의 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자적으로 그것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이며, 거기에는 참된 것을 ‘유지하다’, ‘살다’, ‘행하다’라는 개념들이 포함된다.
--- 「7장 교회의 하나 됨과 다양성」 중에서
‘성도’(saints)라는 말이 성인으로 추앙된 교회의 영웅 아니면, 적어도 창백한 안색과 하늘을 향한 시선과 눈에 보이지 않는 후광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예외적이고 흔히 보통 사람과 구별되는 사람들을 가리키게 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성도’는 하나님 그리고 서로와 화목하게 된 모든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행동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합당하거나’ ‘마땅하거나’ 적절한 반면, 또 어떤 행동은 ‘합당하지 않거나’ ‘마땅치 않거나’ 부적절하다.
--- 「8장 새로운 의복」 중에서
이것은 패배감에 빠진 자들과 자기만족에 빠진 자들, 즉 영적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사람 모두를 위한 메시지다. 패배감에 빠진 자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러면 그분이 너에게 새로운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주실 것이다.” 자기만족에 빠진 자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 하나님이 지금까지 너에게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라. 하지만 도착했다고는 말하지 말라. 아직 가야 할 길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
--- 「9장 또 다른 의의 동기들」 중에서
누군가에게 자신을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그 사람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고자 할 때만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그의 자아를 찾도록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다. 그것은 또한 결혼 관계의 진수이기도 하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 각자는 남녀의 조화로운 상호 보완 관계 속에서 상대방이 더욱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10장 남편과 아내」 중에서
고용주와 종업원은 모두 의무가 있다. 종업원은 열심히 일할 의무를 지고, 고용주는 정당한 임금을 지불할 의무를 진다. 그렇다면 각 사람의 의무는 상대방의 권리가 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종업원의 의무라면,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고용주의 권리다. 공정한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 고용주의 의무라면,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종업원의 권리다. 노사 분쟁의 주요 인간적 문제는 쌍방이 서로 자신의 권리를 확보하고 상대방이 의무를 다하게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강조점을 반대로 뒤집는다. 그는 쌍방에게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책임에 집중하라고 촉구한다. 분명 현대의 산업분쟁에서 쌍방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상대방의 권리를 확보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면, 노사 관계는 즉각 부드러워질 것이다.
--- 「11장 부모, 자녀, 상전, 종」 중에서
명확성과 용기는 여전히 진정한 기독교 설교에서 가장 중대한 두 가지 특성이다. 전파되는 메시지의 내용 및 그것이 제시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명료하게 가르치는 은사를 가지고 있지만, 충실한 내용이 부족하다. 두려움으로 인해 설교 내용이 희석된 것이다. 또 어떤 설교자들은 사자처럼 담대하다.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빼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혼란을 준다. 용기없는 명확성은 사막의 햇빛과도 같다. 빛은 많지만 바라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명확성 없는 용기는 밤의 아름다운 풍경과도 같다. 볼 것은 풍성하지만, 그것을 잘 볼 수 있게 해 주는 빛이 없다. 오늘날 세계의 강단에 필요한 것은 명확성과 용기의 결합, 즉 ‘말씀’과 ‘담대함’의 결합이다.
--- 「12장 통치자들과 권세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