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북돋워 주셨지요. 그분이 혼인 잔치와 추수, 축제와 탈렌트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청중은 숨죽이며 그 말씀에 귀 기울였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항상 청중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비유에는 꼭 한 군데씩 우리를 화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우리를 자극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알려 주려 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화가 난다면, 바로 그 부분에서 하느님과 네 자신에 대한 너의 잘못된 생각들을 발견할 것이다.”
--- p.22, 「들어가며」 중에서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비유는 결국 아둔한 이들에게만 유익하고, 똑똑한 이들에게는 무익한 것이 되고 맙니다. 똑똑한 이들은 그저 교훈만 말해도 직접적으로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훈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비유가 지닌 치유의 힘은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을 때 청중의 마음에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매료되어 마음을 열게 되고, 예수님은 이야기를 통해 청중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십니다. 청중은 불현듯 무릎을 치고, 갑자기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 자기 자신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시각과 정서를 변화시키려면 교훈적인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며, 비유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 p.23~24, 「들어가며」 중에서
우리는 착하게 살려고 하지만, 자기에게서 악한 성향도 발견합니다. 우리는 다정한 모습을 지니길 바라지만, 자기 안에서 증오심과 복수심도 발견합니다. 이러한 가라지들에 놀라서 우리는 이것들을 뽑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 나오는 가라지는 밀처럼 생겨서, 가라지를 뽑으면 밀도 함께 뽑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완벽주의로 인해 자기 마음에서 모든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밀도 수확하지 못하고, 나아가 인생의 열매도 맺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에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밀이 가라지보다 강하고, 가라지는 수확할 때 가려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인생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 p.58, 「밀과 함께 가라지도 인정하라」 중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서 영적인 삶도 결정된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삶을 정신적 관념이나 이상에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물건이나 자신의 몸을 대하는 태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처리하는 과정 등 여러 가지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자신이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삶을 사는 이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영적인 삶을 핑계로 자신이 일상에서 꼭 해야 할 일들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과 직업, 집안일 등을 소홀히 하거나, 현실 세계에서 영적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따로 보지 않으시고, 한데 묶으십니다.
--- p.151~152, 「인생의 길잡이가 되는 원칙」 중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 인생에서 핵심적인 문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마비되는 것을 느낄 때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저의 한계와 불안감을 들킬까 두려워질 때마다, 이 문구를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불안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두려움을 억압하지 않고 유익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주저 없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가 마비되는 일 또한 없게 됩니다. 우리는 두려움이 치유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일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영성 상담의 목표도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저함과 떨림, 화끈거림, 불안감과 같은 불편한 증상들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지요. 그러나 영성 상담의 목표는 질병의 모든 증상을 없애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감, 심리적 압박감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하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심리적 압박감에 자신을 계속 묶어 두지 말고, 그것을 마치 들것처럼 옆구리에 끼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 p.181, 「직접 다가가 치유하신 예수님」 중에서
하느님 나라가 있는 자기 내면의 공간에서 우리는 과거의 행동 방식으로부터 해방되며, 사람들의 기대와 평가에서도 자유로워집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지어 내셨던 우리 본연의 순수한 모습을 인식할 수 있고, 온전하고 건강해집니다. 질병이나 타인의 모욕 등은 우리의 가장 깊숙한 본질을 건드릴 수 없지요. 하느님이 지으신, 세상에 유일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막힘없이 흐르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본래적인 모습은, 우리 안에서 샘솟아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샘터와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존재하는 내면의 공간에서 우리는 순수하고 깨끗해집니다. 그곳에는 어떠한 죄도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 p.268, 「맺음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