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뚜렷함이여! 안 꺼지는 나날의 등불이로다. 그 성체(性體)는 휘영청이 맑아서 시방(十方)에 두루하고, 그 이량(理量)은 영특스리 밝아서 일체(一切)에 잠겼으니, 이 미(迷)함이냐, 이 깨침이냐! 태산(泰山)이 눈을 부릅떠서 오니 녹수(綠水)는 귀를 가리고 가는 증처(證處)인지라, 이 실로 너의 알뜰한 터전인 줄로 알라.
생각 생각이 환함이여! 안 꺼지는 생각 생각의 등불이로다. 그 위덕(威德)은 외외(巍巍)하여 사해(四海)를 거느리고 그 공행(功行)은 당당(堂堂)하여 구류(九類)를 건지니, 이 참이냐, 이 거짓이냐! 옛 길에 풀은 스스로가 푸르르니 바름[正]과 삿됨[邪]을 아울러 안 쓰는 용처(用處)인지라, 이 바로 너의 살림인 줄로 알라.
자국 자국이 시원함이여! 안 꺼지는 자국 자국의 등불이로다. 그 수단(手段)은 호호(浩浩)하여 이변(二邊)을 거두움에 뜻하여 이루지 못함이 없고, 그 방편(方便)은 탕탕(蕩蕩)하여 삼제(三際)를 말아냄에 행하여 달(達)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실다움이냐, 이 헛됨이냐! 만약 오늘 일을 논의하면 문득 옛 때의 사람을 잊어버리는 응처(應處)인지라, 이 오로지 너의 맡음[任]인 줄로 알라.
--- p.7
지금부터 바로 일 년 전 그때까지는 일개 촉망되는 구도자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이분이 그 후에 그야말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의 기연(機緣)을 가진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분이 금반(今般)에 본 강송(講頌)의 교간(校刊)을 나에게 부탁하였을 적에 나는 내심으로 「이분이 불교를 얼마 하지 않은 분이니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겠거니」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나의 정중와(井中蛙)의 소견이냐. 이 강송을 일단 손에 하고 정독하건대 그야말로 언언(言言)이 이인당양(利刃當陽)이요, 구구(句句)가 수쇄불착(水灑不着)이요, 부처의 심간(心肝)을 꿰뚫는 것이요, 중생을 해체(解體)하여 버리는 기발(奇拔) 그것임에 새삼 감탄(感歎) 경복(敬服)을 불금(不禁)하였다. 여기에는 나의 놀라움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백봉 김기추 선생 이분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불법의 도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p.17
“무변허공일구래(無邊虛空一句來)하니 구모토각만건곤(龜毛兎角滿乾坤)이로다.” 번역하여 “가이없는 허공에서 한 구절이 오니, 거북 털과 토끼 뿔이 하늘과 땅에 가득함이로다.” 태초(太初)의 일구(一句)라 하여 두자.
이 소식부터 불꽃이 튀니, 아예 모든 것을 여의고 달려들라
산(山)은 산(山), 수(水)는 수(水), 산수(山水)가 각래(却來)요,
남(男)은 남(男), 여(女)는 여(女), 남녀(男女)가 향거(向去)라.
이러히 이러히니 이것이 이러히네(如是如是是如是)
이러히 밖에따로 이러힌 없는거이(如是外別無如是)
사람은 모른고야 이것이 이러힘을(世人不知是如是)
이저곳 헤매이며 이러힐 찾는고야(左往右往覓如是)
--- p.29
애오라지 부처님이 법의(法衣)를 입으심은 참으로 입으심일까? 그러나 법의를 입으시지 않음도 아니며, 바리를 드심은 참으로 드심일까? 그러나 바리를 드시지 않음도 아니며, 사위의 큰 성안으로 들어가심은 참으로 들어가심일까? 그러나 사위의 큰 성안으로 들어가시지 않음도 아니며, 밥을 비심은 참으로 비심일까? 그러나 밥을 비시지 않음도 아니며, 본곳으로 돌아오심은 참으로 돌아오심일까? 그러나 본곳으로 돌아오시지 않음도 아니며, 진지를 마치심은 참으로 마치심일까? 그러나 진지를 마치시지 않음도 아니며, 의발(衣鉢)을 거두심은 참으로 거두심일까? 그러나 의발을 거두시지 않음도 아니며, 발을 씻으심은 참으로 씻으심일까? 그러나 발을 씻으시지 않음도 아니며, 자리를 베풀어 앉으심은 참으로 앉으심일까? 그러나 자리를 베풀어 앉으시지 않음도 아님이로다. 히힛! “약무공중월(若無空中月)이면 안득천강월(安得千江月)이리요.” 이 무슨 소식일까?
--- p.43~44
장하도다, 장로 수보리시여! 세존이 한마디의 말씀도 끄집어내시기도 전에 그 뜻을 드시었으니 그 경계를 알아차리셨네. 그 경계라서 한 마디의 말귀로 「드무십니다」 하시니 바로 천기(天機)를 누설(漏說)함이로다. 천기를 누설함이여! 구름은 가다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가며, 달은 뜨다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뜨며, 물은 흐르다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흐르며, 꽃은 피다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피니, “여여부동(如如不動)이여 조이상적(照而常寂)하고, 올올회광(兀兀回光)이여 적이상조(寂而常照)로다.” 번역하되 “의젓하여 안 움직임이여, 비추어서 항상 적적하고, 오뚝하여 빛을 돌이킴이여, 적적해서 항상 비춤이로다.” 허허! 한 개 뿔 난 토끼가 물속 달을 품음이로다.
--- p.51~52
삼계라서 곡두런가 복덕또한 곡두로다(三界是幻福亦幻)
본래참이 아니러니 곡둔장차 꺼질것이(本非實故幻將滅)
곡두라서 꺼지며는 성품두렷 밝으리니(幻滅眞性一圓明)
우뚝스리 홀로가리 하늘땅의 그밖으로(屹然獨步乾坤外)
--- p.132~133
부처님이 이 경전을 모신 처소에까지라도 공덕성(功德性)이 서리어 있음을 드신 것에 참으로 중요한 의취가 있음이 느껴진다. 앞에서 경(經)의 수승을 밝히시고 다음은 인법(人法)의 존중을 가리키셨다. 인간으로서의 존중할 바가 성현(聖賢)이라면 성현(聖賢)의 조종(祖宗)은 당연히 부처님이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조종(祖宗)은 누구냐고 할진댄, 두말할 것 없이 경(經)이라고 답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이 경(經)은 불(佛)과 성현(聖賢)의 조종(祖宗)이 되는 바이라, 그 수승(殊勝)함을 좋이 말할 수가 없으니 실로 경전(經典)의 존귀함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럴진대 불(佛)과 성현(聖賢)의 조종(祖宗)이 경전(經典)이라면 그 경의 조종(祖宗)은 마땅히 누구일까? 자! 학인(學人)들은 한마디 일러라. 이 대목도 건성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드높은 관문(關門)이니 사나운 정진으로 돌파하라.
--- p.137-138
이러기 때문에 불(佛)은 비불(非佛)이며 비비불(非非佛)이요, 법(法)은 비법(非法)이며 비비법(非非法)이라 일컫겠으니, 어즈버야, 산하대지(山河大地)는 산하대지가 아니면서 산하대지가 아님도 아니로구나. 에익! 닻줄을 감아라.
--- p.187
이렇듯이 절대성인 평등상면(平等相面)의 바탕이 엄연하므로 상대성인 차별상면(差別相面)의 무궁무진한 조화는 그 연(緣)에 따라 꽃을 피우고 그 기(機)를 좇아서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바야흐로 공중월(空中月)이 있음으로써 애오라지 수중월(水中月)은 청풍(淸風)으로 더불어 일경(一景)을 더하는 것이라 않겠는가. 이러므로 하여서 법신(法身)은 되돌아 색신(色身)이요 색신은 되돌아 법신이며, 체(體)는 바로 용(用)이요 용은 바로 체인지라,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은 비일(非一)이요 비이(非二)이다. 태허중(太虛中)에서 출몰(出沒)하는 억천만의 차별상면도 다 의젓하여 움직이지 않는 법성체(法性體)인 평등상면으로 좇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차별상면은 평등상면으로 더불어서 비일(非一)이요 비이(非二)라 일러서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지마는, 이 말은 공리(空理)에 통달한 분(分)의 소임임도 아울러 덧붙여 둔다.
--- p.209
수보리 장로는 확실히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병에 걸리신 모양이다. 부처님은 수보리 장로가 아직도 모습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쓸어내지 못한 줄로 아셨던지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 여래를 뵈올진댄 전륜성왕도 곧 이 여래이냐」 하시고 크게 철퇴를 내리신다. 장로는 급히 말씀을 돌리시어 「삼십이상으로 여래님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고 황황히 여쭈셨다. 갈수록 태산(泰山)이로다. 해공제일인자(解空第一人者)이신 장로의 첫째 답은 그 때와 그 경우로 보아서 잘못된 답이라면, 둘째 답은 이 때와 이 경우로 보아서 거듭 잘못된 답이라 하겠다. 이럴진댄 앞에서는 색신(色身)에 미(迷)한 답이고, 지금엔 법신(法身)에 깨친 답이실까? 틀렸다. 그렇다면 바탕과 씀이는 따로 놀아나니 무궁한 조화는 뉘라서 굴리게! 이럴진댄 앞에서는 가사답(假事答)인데 지금엔 실리답(實理答)이실까? 틀렸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은 둘이니 초상은 뉘라서 치게! 이럴진댄 앞에서는 도중답(途中答)인데 지금엔 가리답(家裡答)이실까? 틀렸다. 그렇다면 무릇과 거룩은 엇갈리니 천당과 지옥은 뉘라서 말아내게! 그러나 인생의 오는 곳을 알면 앞의 답은 옳다. 그러나 인생의 가는 곳을 모르면 뒤의 답은 그르다. 아서라! 부처님과 장로는 중생을 계오(啓悟)시키는 방편(方便)을 높이 드심이신데, 다만 중생들이 제가 모르고 왈가왈부(曰可曰否)할 뿐이로다. 똥 무더기에서 연꽃이 피듯, 왈가왈부에서 법눈이 밝아지네!
--- p.242~243
이렇듯이 천당을 세우고 지옥을 세움도 도무지 한생각에 달렸고, 중생을 굴려서 부처를 지음도 오로지 한 마음에 걸린 것이니, 어찌 중생이란 이름자를 걷어잡고 부처님의 제도(濟度)를 새삼 기다릴까 보냐. 비록 그러하나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중생성(衆生性) 중에 본래로 생멸(生滅)이 없는 줄을 깨쳐 알고서 입으로는 무상법(無相法)을 말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무상행(無相行)을 닦지 않으면 어느 때를 기다려서 무상도(無上道)를 깨치리요. 알지어다! 법(法)을 취함도 원래가 어리석은 짓이지만, “공(空)을 깨쳤다” 함도 또한 이에 참이 아니어늘, 어디로 향하여서 천진면목(天眞面目)을 접하겠는가. 이 또한 드높은 고개로다. 모름지기 법(法)과 공(空)을 다 놓으라. 놓다가놓다가 보면 안 놓이는 것이 있으리니, 이 바로가 본래로 확연한 영지(靈知)인지라, 애오라지 눈에 보이는 것마다 만고(萬古)의 풍광(風光)이요, 귀에 들리는 것마다가 겁외(劫外)의 지음(知音)인걸! 어찌 들뜬 의심을 좇아서 몸 밖을 향할까 보냐!
--- p.279
호호탕탕 함이러니 말씀없는 그말씀에(浩浩蕩蕩說無說)
부처님과 보살들이 일로좇아 오시구나(諸佛菩薩從此來)
몸을한번 뛰치어서 허공뼈를 추려내니(飜身驀踏虛空骨)
흙소라서 소리치며 긴강으로 들어가네(泥牛大吼入長江)
--- p.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