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같이 답 없이 살아가는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 처지를 이해해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도 내가 감당해야 할 영광스러운 사명과 멋진 목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여러분의 가슴이 뛰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답 없는 현실 속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인애를 베푸는 삶을 선택하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답이 없어서 주눅 든 삶이 아니라 답이 없어도, 아니, 답이 없기 때문에 답 없이 살아가는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멋진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 「시작하는 글」 중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 이유와 원인을 찾아내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인생이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고생을 하는 거지?’라는 의문과 함께 그에게 뭔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 예수 잘 믿는 척하더니, 하나님께 매 맞는 것을 보니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야.’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그런 삶이 자신의 것이 될 때 사람들은 수치감을 느낍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할 때 그들을 징계하시고 교정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우리가 자신의 죄를 찾아 회개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의 문제를 그렇게 일차원적으로만 접근하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내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나?’ 돌아보고, 생각하고, 범죄한 일들을 찾는 동시에 그것이 인생의 고난을 대하는 유일한 접근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 「1장, 답 없이 살아가기」 중에서
룻과 나오미의 아름다운 고부관계만 생각하지 말고, 당신이 룻의 어머니이고, 아버지이고, 가족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겠다고 결정할 때, 룻의 결정을 훌륭한 결정이라고 지지할 수 있겠습니까?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라간 룻의 결정을 칭찬하겠습니까? 어떤 시각으로는 룻을 “믿음이 대단하다”고 칭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녀의 가족이라면 그 결정을 결코 지지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어떻게든 룻을 말리기 위해 애를 썼을 것입니다. 룻을 사랑하는 친구, 부모, 친척이라면 룻에게 시어머니를 따라가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 답도 없는 상황에서 룻이 내린 결정은 자신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앞으로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전무한 시어머니를 사랑하기로 한 결정이었습니다. 룻은 자기가 처해 있는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을 벗어나기로 결정하는 대신, 그 답 없는 현실을 껴안고 가기로 결정했고, 무엇보다 시어머니를 사랑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답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선택하는 최고의 삶입니다. 룻이 이 모든 일의 행복한 결과를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했을까요? 결국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개인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그 결정과 선택을 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상황에서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결정했을 뿐입니다.
--- 「2장, 답 없이 사랑하기」 중에서
어찌 보면 비통함과 쓰디씀을 의미하는 ‘마라’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답 없는 삶을 잘 표현해 주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딱 떨어지는 답을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고, 신앙 공식만 적용하면 답이 나오는 삶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설명이 안 되는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마라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 여정에서 엘림이 아닌 마라를 지날 때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마라에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의 인생에도 쓰디쓴 마라가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당신은 믿음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마라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엘림에서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은 아닙니다. 물을 마시지 못하면 갈증을 느끼고, 음식을 먹지 못하면 허기를 느끼고, 통증을 느끼면 괴로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기에 외로움도 느낍니다. 그래서 당장은 웃음이 사라지고 가슴의 벅찬 감격도 식어 버리고 말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마라에서도 믿음과 기쁨의 실재를 경험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괴롭고 힘든 마라에서 그리스도인이 기쁨을 얻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 담겨 있는 그분의 풍성한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은혜를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마라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방식입니다.
--- 「3장,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우리는 은혜를 받을 때에도 이 세상의 틀 안에서 은혜를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나를 실패의 구덩이 속에서 건져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폼 나게 살면서 사람들 눈에 멋져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서 누리는 은혜가 세상의 틀과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우리가 그런 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말씀을 제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돈을 축적하는 삶을 살겠다는 틀, 세상에서 성공하겠다는 틀로는 진정한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시간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사람을 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주신 뜻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사랑하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 「4장,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