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의미 없는 세계에 의미를, 희망이 없는 세계에 희망을, 정의가 없는 세계에 정의를 집어넣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대표한다. 오래된 경험들이 인간에게 제기하는 도전치고 이보다 더 큰 것이 있는가? 인간이 이 세계에서 하는 일 중에 그 세 가지 작업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있는가?
--- p.15, 「오래된 것들의 도전」 중에서
이야기는 인간의 에로스적 활동이다. 이야기가 끝나는 날 인간은 최종적으로 소멸하고 이야기의 세상도 끝난다. 이야기의 세상이 끝나면 인간의 역사도 끝난다. 이야기의 종언이 역사의 종언이다. 그 종언의 시간을 늦추고 연기하기 위해 오늘도 이야기꾼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 p.15, 「오래된 것들의 도전」 중에서
유한성의 경험에 모순이라는 주사약을 찔러넣는 순간 그 경험에는 드라마가 도입된다. 인간은 자신의 목숨, 자원, 능력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유한성에 보복하려는 충동과 욕망을 갖고 있다. 그 욕망은 무한하다. 인간은 무한한 생명, 무한한 능력, 무한한 권력, 무한한 지식처럼 무한한 것을 찾고 무한한 것을 그리워한다. 유한한 존재의 내부에 무한한 욕망이 들어 있다는 것은 기이한 모순이다. 이 모순 때문에 인간은 내부로부터 쪼개어져 있다. 섹스와 죽음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특이해지는 것은 이런 모순과 분열의 경험 때문이다. 그는 섹스하는 존재여서 유별난 것이 아니라 섹스에서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모순적 동시 공존을 경험한다는 사실 때문에 유별나다. 그는 죽는 존재여서 유별난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유한성과 무한성의 모순적 동시 공존을 경험하기 때문에 유별나다. 이 유별난 특성을 이야기 만드는 데 도입하는 것이 모순이라는 드라마의 주입이다. 섹스와 죽음처럼 오래된 것들이 이야기꾼에게 제기하는 도전은 이런 것이다.
“너는 진부한 것에서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 p.14, 「오래된 것들의 도전」 중에서
문학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지배적인 문화 형식이 아니고 대중의 문화적 삶에서도 중심적인 향유 대상이 아니다. 문학의 이 같은 위상 약화는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무력감을 안겨주고 ‘지금은 문학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곤경을 호소하게 한다. 그러나 너무 기운 빠지기 전에 미리 좀 말하자면, ‘기업하기 좋은 시대’라고 말할 때와 같은 의미에서의 ‘문학하기 좋은 시대’라는 것이 있겠는가? 사실 역사상 어느 시대에도 문학은, 한국에서건 어디 다른 곳에서건 간에, 문학 그 자체의 행복을 위해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나팔 불어주고 꽃을 뿌려주는 축복의 계절을 가진 적이 없다. 문학하기 좋은 시대라는 것 따로 있고 문학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것이 또 따로 있어서 시절이 좋으면 번성하고 시절이 나빠지면 말라비틀어져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그런 문학에 ‘문학’이라는 명칭을 붙여줄 수 있겠는가? 지금은 문학이 축복받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 불가능한 시대도 아니다. 문학이 어려운 시대에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역설적 화두를 생각해보는 것이 지금 문학의 할일 가운데 하나이다.
--- p.20~21, 「지금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중에서
다른 예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학도 작가라는 존재의 정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일탈과 도전의 창조적 자유가 생명인 예술 분야이다. 그러나 시장시대에 문화콘텐츠로 생산되어야 하는 문학은 그런 자유를 반납해야 한다. 문화산업에, 대중 소비자들에게 시장시대의 행복과 만족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콘텐츠 생산의 제1법칙은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라’이다. 문화산업은 오늘날 대중의 행복천사가 되어 있다.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문학이 행복천사의 나팔수가 되고 하수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 인간의 삶을 왜곡해야 하고 삶의 진실을 희생해야 한다. 이것은 문학이 견딜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든 시장의 신을 숭배하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번영과 안전을 얻을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 시장시대의 행복신화이다.
--- p.24~25, 「지금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중에서
지금은 문학이 축복받는 시대는 아니다. 그렇다고 문학이 통째로 지옥에 빠진 시대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어정쩡한 진술은 두 극단을 피한 중간쯤 어딘가에 진실이 있다고 말하기 위한 절충의 수사가 아니라 시대와 문학 사이의 교섭의 다면성과 복잡성을 존중하려는 비평적 판단의 표현이다. 문학은, 문학이라는 형태의 글쓰기가 몹시 어려운 시대에도 마치 지옥의 지붕을 뚫고 나오는 꽃대처럼 솟아난다. 문학의 이런 힘과 생명력은 시대와의 편안한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 곧 불편한 관계에서 나온다.
--- p.29~30, 「지금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중에서
기억과 경험은 ‘이야기’의 형태로 존재하고, 이야기로 전달되고 표현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람은 이야기 속에 태어나 이야기로 성장하고 이야기를 만들며 살다가 이야기를 남기고 죽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이야기로 만들어진다’입니다. 이야기가 사람을 만듭니다. 어떤 이야기 속에 태어나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고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사는가,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 p.41, 「디지털시대의 독서론」 중에서
영상시대란 인간이 ‘세계를 이미지로 바꾸고 그 이미지를 소유하는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 시대는 시각 쾌락의 시대, 시각에 의한 세계 소유의 시대, 시각의 권력화 시대이다. 영상시대의 문학은 시각의 노예가 아니라 시각 쾌락의 시대에 대한 반역이다. 그 반역이 아니고서는 인간존재의 확장과 심화가 불가능하고 존재의 부단한 확장과 심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문학은 어디에서도 그 심미적 차원을 확보하고 유지할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p.63, 「영상시대의 문학의 힘과 가능성」 중에서
문학공동체 사람들은 함께, 그러나 서로 다른 눈으로, 문학 읽기에 참여한다는 것이 인생 경험을 심화하고 인간 이해와 공감의 가능성을 확장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삶을 기쁘고 즐거운 것이게 하는 비결의 하나는 바로 이런 종류의 심화와 확장의 경험이다. 읽는다는 것은 삶 그 자체이고 우리네 인생이며 이 지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짧은 영광의 순간이 아닌가.
--- p.70, 「문학전집, 왜 읽는가」 중에서
문학성은 지금 가치이면서 문제이다. 가치이자 문제로서의 문학성이 이 시대의 문학에 요구하는 것은, 뚫린 귀로 듣고 잘 해석해보면, ‘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 소리내고 웃고 울고 노래하고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 p.270, 「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 중에서
시장가치란 ‘그 (시장)가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가치나 규범으로 인정하지 않는 유일 가치’이다. 유일 가치는 유일 권력과 마찬가지로 폭력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조지 소로스 같은 자본가를 두려움에 빠뜨리고 있는 몰가치?무규범 시대에 ‘문학’의 이름으로 존재해야 하는 문학이다. 그 문학은 불가피하게 ‘시장문학’이다. 그러나 동시에 시장문학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는 열망을 그 문학은 자신의 내부 명령으로 갖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문학의 딜레마이며 이 딜레마는 아주 정확히 이 시대 인간의 딜레마(‘살자니 이래야 하고 이러자니 죽겠고’)와 일치한다. 문학의 이 딜레마는 역사적인 것이고 그 딜레마를 뚫으려는 문학의 싸움은 정치적인 것이며, 문학이 지키고 실현해보려는 시장가치 이상의 가치는 물건 아닌 인간을 지켜내려는 예술적 가치이다. 이것이 오늘날 문학의 모습, 일, 꿈이고 문학의 문제의식이다. 이 문제의식이 구성해낼 수 있는 문학적 소재와 주제는 사실상 무한이다.
--- p.269~270, 「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