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나는 길을 잃었다
사춘기 시절 나의 영적 위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들 누구나 신앙의 시련을 겪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위기를 겪어도 모두가 나와 같은 상황에 이르지는 않는다. 몇 년 뒤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이 쓴 글을 읽었다. 자신이 10대 시절에 겪은 위기에 관한 글이었다. 나와 그 시절이 너무도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볼드윈도 나처럼 지성을 통한 위기를 겪지 않았다. 그도 초자연적인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의심은 나중에 찾아왔다. 그와 내가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단순히 거친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상의 무엇은 없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나님과 안전이 동의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볼드윈은 이렇게 썼다. “열네 살 때 처음으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 안팎의 악이 두려워졌다.”
그 당시 볼드윈은 무신론자였다. 그가 만약 초자연적인 것을 반대하는 조롱의 글로 기독교를 공격했다면 나는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교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게 내세웠다면 나는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독선적이거나 교만한 모습, 심지어 냉소적인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도 나처럼 무너진 사람이었다. “나는 전보다 더 외롭고 더 취약했다. 어린양의 피는 나를 전혀 깨끗하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신앙의 위기를 경험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용기의 위기였다. 나는 두려웠다. 거듭난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들이 새생명이 없다는 증거일까 봐 두려웠다. 어떤 희망이나 의미도, 무엇보다도 인생의 끝에 본향이 없을까 봐 두려웠다. 내가 혼돈의 우주속에 던져진 고아가 아닐까, 나를 지켜보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의 궁극적인 결말은 파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이 차올랐다. 내가 종교를 잃기 시작했을 때 공포가 노도처럼 밀려왔다. 종교를 잃는 것은 곧 예수님, 나, 미래를 잃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록 내가 위기에 빠진 줄 전혀 몰랐지만 그 어두웠던 터널에서 사랑으로 나를 지탱해 준 교회 가족들을 잃는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심연의 밑바닥까지 떨어질 뻔했다가 다시 일어섰고 지금도 여전히 일어서 있다.
--- 「살기 위하여 광야로」 중에서
위기의 순간 만나게 되는 일어설 용기
위기와 추락의 순간,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났다. 바로 그 상황속에서 그는 일어설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일어서다’란 표현에도 속을 수 있다. 우리는 믿는 바를 위해서 ‘일어선다’라고 말하며, 대개 이는 자신감 있는 자세를 의미한다. 예컨대, 허리에 두 손을 대고 어깨를 쫙 펴는 행동으로 자신감을 표출하라는 리더십 코치들의 조언을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성경적인 영광의 자세는 이와는 다르다. 강제로 십자가에 손발이 묶여 있는 자세야말로 성경적인 영광의 자세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어선다’는 것은 내면의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거나 반박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승리’로 적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기는 더 큰 힘과 지혜로 세상의 힘과 지혜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처럼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이끌려갈 때 찾아온다(요 21:18). 성경은 우리에게 일어설 용기를 어떻게 얻게 되는지 분명히 알려 준다. 일어설 용기는 곧 십자가에 달릴 용기에서 시작된다.
이런 종류의 용기는 위기 속에서 형성되며, 때로 그런 위기(삶의 전환점)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런 위기는 대개 거창한 순간들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결정의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결정이 쌓이고 쌓여서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떻게 두려움에 맞서는지를 형성한다. 그런 순간들은 극적이지 않다. 대신 그 작은 순간들은 ‘나비 효과’처럼 우리가 당시는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서서히 미래를 바꿔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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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는 거창한 일을 하기 위해서만 필요하지 않고 조용한 일상을 정직과 사랑으로 살아 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런 삶은 단순히 ‘이슈’를 분명히 아는 것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의 문제가 사실상 추상적인 이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삶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끝을 알지 못해도 광야 속으로 들어가는 용기, 일어설 용기, 무너질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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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보이신 이 길을 엘리야는 갔고, 당신도 가야 한다. 용기는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던 갈멜산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용기는 진짜 적이나 상상 속의 적과 싸워 이기거나,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많은 사람에게 환영을 받을 때 나타나지 않는다. 용기는 엘리야, 그리고 그의 길을 따랐던 모든 이들처럼 스스로 설 수 없을 때, 거친 광야에서 쓰러져 있을 때, 심지어 어서 죽음을 달라고 애원할 만큼 괴롭고 답답할 때 만나게 된다. 그 순간이 오면 엘리야처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엘리야는 자신이 시내산으로 가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갈보리산으로 가고 있었다. 당신도 엘리야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잘 생각해 보라. 당신도 엘리야처럼 시내산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으나, 돌아보면 갈보리산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만이 일어설 용기를 찾을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용기라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지도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용기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우리의 롤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몸소 먼저 보이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용기의 길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제 예수님이 위기를 통해 보이신 용기의 길을 향해 출발해 보자.
--- 「1장.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중에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