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하 신흥우 박사는 1883년 양력 3월 26일, 아버님 신면휴(申免休)와 어머님 안동 김씨 부인의 3형제 중 막내 아드님으로, 지금의 충청도 청원군(*현재는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묵정리(墨井里)에서 태어났다.
가계에 대해 말하면, 멀리 신숙주(申叔舟, 1414-1475)3에게까지 올라가야 한다. 신흥우 박사는 신숙주의 16세손이며, 2세손 신광윤(申光潤, 1468-1554)4 대에 서울에서 지금의 묵정리로 낙향하여 신씨 가문을 이루고 대대로 살게 되었다.
신광윤이 낙향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서였다. 즉 연산군의 생모 윤씨에게 사약을 먹여 죽이는 소동과 관련하여 1498년 무오사화가 있었고 1504년에 소위 갑자사화가 있었는데, 신광윤은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한 당시의 거물 윤필상(尹弼商)의 외손녀사위 되는 사람이다. 엎치락뒤치락 정변이 반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참형당한 사람의 일가인 그의 신변이 안전할 리 없었다. 신광윤은 화를 면하기 위해 파직하고 멀리 시골로 가서 숨어 살기를 결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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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결과 장인환이 10년 징역을 언도받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수백 명이 대낮에 행길에서 다 보고 세상이 떠들썩했던 사건에 대하여, 아무리 생명을 귀중하게 여긴다 해도 무기징역이나 1년 징역이 된다든지 하면 몰라도 재판장이 10년 징역을 선고하는 것을 볼 적에 나는 속으로 말이죠, 야, 미국 국민은 전체가 이런 문제에 대해 상당히 동정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장인환은 필경 7년가량 징역살이를 했는데, 그는 감옥 안에서 품행이며 마음씨가 다 훌륭하다고 해서 미리 석방된 것입니다. 그는 선천(宣川) 사람인데, 그 후 우리나라에 와서 고향에 가서 장가들고 부인을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가는 것을 내가 보았습니다. 허나 혼인해 가지고 잘 살다가 어째 그랬는지 내용을 들어보지 못했지만 결국 4층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말을 풍문에 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신 박사가 미국 남가주 대학의 문리과대학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26세의 피 끓는 청년으로서, 애국하다 잡혀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 장인환을 구출하기 위해 애쓴 이 이야기는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것이기에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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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박사는 처음에는 당황했다. 허나 국내 동지들은 간선제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이상 국회의원 대다수가 이 대통령에게 반기를 드는 만큼 신 박사가 출마한다면 가망이 많다는 것을 역설했다. 신 박사 역시 처음에는 낙관하며 동지들에게 대통령 출마를 약속했다. 간선제를 직선제로 개헌하면서까지 번의(?意)하는 이 대통령에게 신 박사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자 동지들은 다 같이 신 박사에게 출마를 포기하도록 간곡히 권했다. 신 박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미국에 있는 동지들에게 공약을 했으므로 만약 포기한다면 그들을 배신하는 것이 되며, 둘째로 한번 결심한 바에는 되든 안 되든 끝까지 해보는 것이 떳떳하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김호(金乎)8 씨가 25만 달러라는 거액을 선거 자금으로 주면서까지 밀어주는데 중도에 포기한다면 친구의 의리상 안 될 말”이라고 딱 잘라 말할 때는 누구나 더 이상 권할 수 없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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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실력으로는 신 박사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결코 쓰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일상 대화에서 서툰 영어를 쓰는 것을 볼 때면 참을 수가 없었지만 그는 그런 사람들을 면박하거나 핀잔을 주지 않고 한국말을 아름답게 쓸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 주었다. 일례를 들면 ‘넥타이’는 ‘댕기’, ‘양말’은 ‘버선’, ‘와이셔츠’는 ‘속적삼’, ‘연필’이나 ‘만년필’은 ‘붓’, ‘드라이버’는 ‘나사손’, ‘파이어 플레이스’는 ‘벽화로’ 등등으로 썼으며, 아무리 새로운 말이나 물건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우리말을 발견하여 토착어로 아름답게 썼다.
이와 같이 그는 너무나 앞서고 너무나 잘 알고 세련되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먼저 일종의 소외감이라 할까, 열등의식이라 할까, 자격지심 같은 것을 느껴 그런 혹평을 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신 박사는 그들을 상대하여 왈가왈부하지 않고, 오직 침묵을 지켰다. 반면 미국 사람이나 권력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게 우월감을 갖고 으스댈 때는 가차 없이 그 사람을 혼내 주었다. 어쨌든 그는 성미 탓으로 이유 없는 오해를 받은 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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