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은 1월 30일 김일성에게 전달하라고 시티코프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나는 김일성 동무가 불만스러워 하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가 착수하려는 남한 관련 대형 사안에는 큰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이해해야 한다. 이런 문제는 조직이 되어야 큰 위험이 없을 것이다. 김일성이 이런 문제를 나와 의논하고자 원한다면 나는 언제나 그를 맞이하여 논의할 태세가 되어 있다. 이 모든 사항을 김일성에게 전달하고,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그를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통보하라.”
--- p.41~42, 「1. 스탈린, 아시아에서 전쟁 도발을 승인하다」 중에서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논거를 댔다. 북한군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3일 만에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한에서 20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남한 정부를 뒤엎기 위해 봉기하고 북한인민군을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내전에서 승리하고 이제 모스크바와 동맹관계인 중국이 도울 것이라고도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주장을 받아들였지만, 유럽에서 당면한 난제들 때문에 물자와 남침 계획 수립에 군사적인 원조를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전쟁에 개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 p.56, 「2. 김일성, 남침을 계획하다」 중에서
한국전쟁은 NSC 68에 포함된 계획들을 채택하는 데 필요한 추동력을 제공했다. 만약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국방비의 대폭적인 증가는 행정부의 승인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지출 증대에 반대하거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숫자와 지위는, 특별위원회에서 예산실, 재무부, 경제자문위원회 대표들이 제안된 계획들에 대해 가했던 비판적인 지적들이 그랬던 것만큼이나 매우 인상적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트루먼이 그 압도적인 사례(한국전쟁의 발발_옮긴이)가 없었더라면 지출의 대폭적인 증가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 p.131, 「5. 폴 니츠, 경종을 울리다」 중에서
군대의 규모와 자질을 떠나 훈련과 군비 면에서도 북한은 훨씬 우위였다. 조선인민군은 약 1,000명의 소련 고문관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중국공산당 군대에 복무하다 귀국한 적어도 4만 7,000명의 ‘조선의용군’으로부터도 큰 도움을 받았다. 북한은 151대의 T-34 탱크와 176문의 SU-76 자주포, 그리고 다수의 122밀리미터 곡사포를 가진 기계화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공중 근접지원을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전투기 및 전폭기 130대도 갖고 있었다. 이에 비해 남한은 실질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비행기와 탱크 또는 대전차 지뢰를 갖고 있지 않았다.
--- p.139~102, 「6. 북한, 남침을 개시하다」 중에서
맥아더는 인천에 대담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그 여세를 몰아 서울을 탈환할 생각을 이미 7월 중순에 갖고 있었다. 이 작전은 9월 중순(조수가 그런 작전을 수행하는 데 알맞은 유일한 시점)에 시행하기로 일정이 잡혔으며, 북한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침략군을 분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 p.180, 「8. 더글러스 맥아더, 모험을 감행해서 승리하다」 중에서
인천상륙작전은 곧 한국전쟁의 진로를 바꾸었고, 공산주의 국가의 수도 3곳에서 커다란 정책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베이징에서, 당 지도자들은 중국군이 교착 국면을 승리로 전환시키는 역할까지는 못하겠지만 이제 전투의 선봉에 서서 유엔군의 북한 정복을 저지할 1차적인 책무를 지게 되었음을 인식했다. …… 같은 시점에 마오쩌둥은 가오강에게 이렇게 글을 써 보냈다. “우리는 거기(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인다. 때를 놓치지 말고 준비하라.”
--- p.223, 「9. 마오쩌둥, 인해전술로 개입하다」 중에서
딘 애치슨은 강력하고 번영하며 단합된 서유럽을 구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유럽대륙을 분리시켜 지배하려던 소련의 노력을 좌절시켰다. 그는 유럽을 미국 안보와 경제 정책의 최고 우선순위에 두어 이를 성공시키는 한편, 국내에서 아시아 우선주의의 도전을 꺾고 아시아에서 북한과 중국의 공격을 패배시켰다. 트루먼과 애치슨이 정착시킨 이런 정책들은 냉전 기간 내내 그리고 21세기까지 지속되었다.
--- p.347, 「12. 딘 애치슨, 유럽방위를 주도하다」 중에서
최초의 원자탄 제조는 이런 소련의 과학자들과 관리자들의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1945년 8월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착수한 지 4년 만에 성공적인 실험을 성취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루스벨트가 원자탄 개발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경주하기로 1941년 10월 결정한 후 소요된 기간보다 3개월이 더 걸렸을 뿐이다.
--- p.460, 「15. 이고리 쿠르차토프, 소련의 핵무기를 개발하다」 중에서
한국에서 수많은 CIA 임무가 실패한 것은 훈련이 엉망이고 거점 간부들이 날조된 보고서를 보냈기 때문이다. 1951년 2월부터 4월까지 한국에서 공작 책임자였던 OSS 출신 한스 토프트(Hans Tofte)는 북한에서 월남한 1,200명을 훈련시켜서 유격대원으로 북파했다. 그들의 임무는 정보를 수집하고 사보타주를 수행하고 격추된 미군기의 승무원을 구출하는 일이었다. 44개 팀으로 편성된 그들은 4월과 11월 사이에 보트와 낙하산으로 북한에 투입되었다. 토프트는 그들의 성공적인 활동에 관한 장문의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본부에 타전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 준군사 공작원들은 거의 모두 살해되었거나 붙잡혀서 CIA 거점에 거짓으로 보고해야 했다. 살아서 돌아온 자는 하나도 없었다.
--- p.524, 「16. 월터 베델 스미스, CIA를 개혁하고 확장하다」 중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된 지금 우리는 한국전쟁의 모든 당사자들이 결정했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는 출처가 많다. 최근의 공식 역사서와 새로운 문서 덕분에 트루먼 행정부의 결정에 관해 우리가 아는 이야기가 더 풍성해졌다. 소련과 중국의 정책에 관해 새로 발굴된 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전쟁 지원을 거듭 요청하고 한국전쟁을 개시했다. 소련 독재자는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는 위험을 제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미국과의 전면전을 확고하게 회피했다. 더욱이 ― 스탈린이 미국의 미흡한 전투태세를 알고 있었고 워싱턴의 정책결정에 관해 빼어난 스파이들의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 그는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조그만 위험이라도 피하기 위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군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대신 마오쩌둥을 조종했다.
--- p.546~547, 「17. 한국전쟁, 냉전을 격화시키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