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축사회는 이렇게 출현했다
약 9,000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대’(팔레스타인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지 역)에서 밀 재배가 시작되었다. 강수량이 꽤 높은 중국 내륙지역에서 는 작은 조와 수수에 의지하는 농업사회가 발달했다. 서방에서 중국으로 밀이 전해진 것은 한나라 시대 이후다. 습윤한 양자 강長江 유역에 서는 오래전부터 쌀이 재배되었지만, 쌀이 중국의 주식이 된 것은 당 나라 때 일이다. 한편 야생동물에게 밭은 최고의 먹이였다. 인류는 먹이를 찾아 밭으로 몰려드는 염소, 양 등 동물의 특징을 파악하여 마침내 그것을 귀 중한 단백질원으로 관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목축이다. ‘목축’의 중심지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점차 ‘밭’에서 벗어나 풀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북쪽 초원지대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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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고대 제국
서쪽에서부터 순서대로 보면 주요 고대 제국으로는 로마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제국), 마우리아 왕조, 진 제국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제국이 기원전 6세기에 유목민계 페르시아인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를 정복하여 이란 고원지대, 소아시아를 포함한 지역에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기 원전 550년~기원전 330년)이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유일한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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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의 세계 대제국에 대한 야망
기원전 334년, 그리스의 북쪽 변방 마케도니아의 젊은 알렉산더 3세는 그리스와의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제국으로 원정에 나섰 다.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정교사로 두고 자란 알렉산더 3세 는 아케메네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세계의 패자가 되려는 야망에 불타 올랐다.
알렉산더는 원정 과정에서 페니키아인의 중심도시 티루스를 철저 하게 파괴하여 동지중해의 주도권을 그리스인의 것으로 만들었다. 기 원전 331년에는 ‘가우가멜라 전투’(아르벨라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무찔러, 나일 강의 수위 저하로 계속되는 기근을 겪고 있던 이집트로부터 ‘페르시아로부터의 해방자’라는 큰 환영과 함께 파라오의 칭호를 부여받았다.
이집트의 풍부한 곡물이 알렉산더군에 힘을 실어주었고, 기원 전 330년에는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후 300년 동안을 ‘헬레니즘 시대’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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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아리아인이 만든 카스트 제도
히말라야 산맥 등의 거대한 산 덩어리에 의해 유라시아로부터 격리 된 인도 아대륙은 유라시아 역사에서 단절된 상태가 지속되었다. 인도 세계의 중심이 대건조 지대의 일부인 인더스 강 유역에서 동쪽의 습윤한 갠지스 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쌀에 의존하게 되자 그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인도는 몬순의 영향으로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는 북부와 건조한 데 칸 고원의 남부로 나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해발 1,070미터의 카이바르 고개를 넘어 인도 펀 자브(5대 강) 지방으로 한 번 침입한 사람들이 풍요로운 반도부에 그대 로 체류하면서 인도 아대륙에 복잡한 사회가 형성되었다. 백인 유목민 아리아인은 인더스 문명을 이끈 드라비다인을 정복하여 인종 및 민족 차별을 체제화했다.
--- p.93
이슬람교는 이렇게 탄생했다
누구도 예기치 못한 뜻밖의 사건으로부터 시대의 전환이 시작된다. 뜻밖의 사건 위에 많은 사건이 쌓이고 쌓여 역사의 새로운 트렌드가 형성된다. 물론 새로운 움직임이 중간에 무너져 버리는 경우가 압도적 으로 많지만 말이다. ‘유목민 폭발 시대’는 7세기 ‘혹서’와 ‘가뭄’이 지배하던 불모의 땅,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되었다. 지정학적으로 봤을 때 페르시아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남쪽에 위치한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전혀 이상할 이유가 없다. 시대를 전환시킨 핵심인물은 아라비아 반도의 중심도시 메카에서 태어난 사막의 상인, 무함마드(570년경~632년)였다. 태어나기 반년 전 에 아버지가 교역지에서 병사하고, 6살 때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고아 가 된 인물이 만년에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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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히크 항해왕자가 목표로 한 모로코 획득
대서양으로의 새로운 시대를 주도한 것은 유라시아 서쪽 변두리에 위치한 인구 약 100만 명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황무지가 많아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없어 레콘키스타를 연장하여 이슬람교도가 지배하는 모로코에 진출하려 했다(세우타 공략). 하지만 허무하게 실패하여 대서양 연안에서 아프리카에 접근하고자 했다.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서안 탐험은 엔히크Henrigue 항해왕자(1394년 ~1460년)에 의해 조직되었다. 엔히크 왕자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아프리카였으며, 대서양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그는 바다를 통해 이슬람 상인과 서수단 흑인사회 간에 이루어졌던 사하라 사막 너머의 황 금무역에 진출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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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으로 도시가 역사를 주도하는 시대로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사회를 단기간에 변화시키지 않았다. 긴 세월에 걸쳐 바람직한 세계의 모습을 그 근본부터 전환시킨 산업혁명은 서서히 이루어진 사회변혁이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보면, 화석연료인 석탄을 연소시키는 증기기관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에너지와 기계들을 연결시키는 공장이, 봉건 적 지배의 거점이었던 도시를 거대한 생산의 장으로 바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지에 산업도시가 탄생하여 농지를 훨씬 능가하는 생산력으로 세계사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바로 산업도시가 주도하 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p.243
세계적으로 중요해지는 태평양
태평양은 그 크기가 너무 광대해서 세계사 속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립할 수 없었다. ‘물의 사막’이었던 셈이다. 이는 대서양이 자본주의 경제와 국민국가 체제에 의해 근대세계의 틀을 마련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 20세기 말에 세계 규모의 ‘전자공간’이 형성되어 경제의 글로벌화가 진행되었다. 또한, 아시아 여러 나라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자 마침내 세계사는 태평양 세계에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태평양의 군사패권은 확립했지만, 경제권 성장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태평양은 미소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미국의 군사적 우위가 흔 들려 태평양 세계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의 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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