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문학적인 통일성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복합성의 차원에서 역사서들을 바라보는 학자들의 이론을 알고 있고, 필요한 부분에서 그러한 이론들과 대화를 하려 한다. 우리는 많은 자료와 손길들이 역사서 형성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역사서들을 현재 형태의 본문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전에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어떤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고 느낀다. 현대 독자들에게 알려진 문학적인 관례들과는 어느 정도 상이한 관례에 따라 역사서들이 해석될 가능성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반대 견해들을 제시하고 나면, 독자들은 문학적인 통일성을 전제로 하는 우리의 견해가 타당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문학적으로 어색한 부분들이나 신학적으로 상충하는 부분들에서도, 우리는 내러티브의 예술성과 신학의 통일성을 발견한다.
---「1장. 역사서란 무엇인가?: 최근 학자들의 견해」중에서
여호수아서는 여호와께서 모든 지파에게 ‘안식’(1:13, 15)을 주실 것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전투가 끝난 후 이 ‘안식’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보고한다(11:23; 14:15; 21:44; 22:4; 23:1). 신명기 12:10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혹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로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안식을 주사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때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택하실 장소에서(14절) 어떻게 여호와를 예배할 것인지를 언급한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그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는 시점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여호수아서에는 아직 많은 땅이 점령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데도 이스라엘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성막이 세워지는 실로는 여호수아 18-22장에서 신명기가 언급한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사사기에서 안식은 이스라엘 백성이 일시적으로 누리는 것이 되어 버린다(삿 3:11; 5:31; 8:28). 그리고 다윗 시대에 가서야 신명기 12장의 성취 가능성은 다시 현실로 다가온다(삼하 7장).
---「3장. 여호수아서」중에서
다른 차원에서 삼손은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거룩한 부르심에 대해 적당히 타협하고, 여기저기서 잘못을 범하고, 스스로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여호와의 구원을 경험하고, 여호와를 이용하며(16:20), 여호와께 버림을 받은 것 같지만 완전히 버림받지는 않는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에 적용된다. 사사기 13-16장에 나오는 어떤 모습들은 내레이터가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 의도일 수도 있다. 내러티브는 삼손의 행동에서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강조한다. 특히 16장은 거의 사실적이지 않다. 삼손이 블레셋 지도자들과 장난을 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위험을 감수한다(그렇지 않다면 들릴라가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다’고 말할 때, 삼손은 그 말을 농담으로 믿고 있었는가?). 불임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13장), 수수께끼(14장), ‘마술적인 힘’(16장)과 같은 민담의 요소들은 삼손 내러티브로 하여금 정형화된 느낌을 받게 한다. 바로 이러한 특이한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삼손 내러티브를 단순하게 나타난 것만을 보지 않게 하고, 여호와 앞에서의 이스라엘의 위치를 보여 주는 하나의 비유로 보게 한다.
---「4장. 사사기」중에서?
사무엘상 8-12장 단락은 왕정에 대하여 복합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든 종류의 왕정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좋지 않은 동기로 왕을 요구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것은 결국 잘못된 왕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잘못된 왕을 허락하시는 것은, 사무엘상 10:18-19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의 심판(징계)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통치 초기에 행한 모든 선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다윗마저도 권력을 남용하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에도 불구하고, 사무엘하 20장에 가면 우리는 사망, 전쟁, 불행, 심지어 포로(다윗과 그의 병사들이 예루살렘을 떠남) 사건들을 대하게 된다. 사무엘상 2장에서 엘리의 집에 심판을 선언했던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오직 충성스러운 지도력만을 축복하신다’고 선포한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길 것이다’(30절). 이 원칙은 사울과 다윗에게 공히 적용된다. 사무엘서는 하나의 분명한 질문을 던진다. 왕정이 과연 축복인가? 그 대답은 그 왕이 여호와께 순종하는 조건에서만 ‘예’가 될 수 있다.
---「5장. 사무엘서」중에서?
대부분의 구약 예언서는 열왕기에 기술된 사건들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많은 예언서의 서문은 예언자의 활동을 이스라엘과/또는 유다의 한 왕 또는 여러 왕의 통치에 연결한다(예를 들면 호 1:1; 사 1:1; 렘 1:1-3). 열왕기하 18-20장은 상당 부분 이사야 36-39장과, 열왕기하 25장은 예레미야 52장과 중첩된다. 따라서 열왕기에서 예언 활동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예를 들면 왕하 17:13; 24:2)과 개별 예언자들에 관한 언급(요나, 왕하 14:25; 이사야, 왕하 18-20장)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예언자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것이 놀랍게 보일 수 있다. 아마 열왕기에서 예레미야의 부재는 가장 주목할 만할 것이다. 이에 관한 하나의 설명은 ‘열왕기 구성의 마지막 단계가 많은 예언서가 최종 형태에 도달했을 때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 형태의 열왕기는 언제나 예언서들과 함께 읽도록 의도되었던 것 같다.
---「6장. 열왕기」중에서?
룻기는 신학적인 주제를 직접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이야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 주제들을 찾아내야 한다. 룻기는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등장인물들의 삶에 제기된 문제들이 완전히 해결될 때, 이스라엘의 생활상은 밝은 모습으로 드러난다. 나오미와 보아스가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 베들레헴 사회는 풍요로움과 즐거움의 상태를 누리게 된다. 베들레헴 주민들은 상처받기 쉬운 처지에 있는 이방 여인 룻을 자신들의 마음과 삶에 받아들임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신실함을 보인다. 룻기가 이야기 속에 구약성경의 율법을 반향하는 것은 이 때문인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신실하게 맞추어 나갈 때, 여호와께서 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을 축복하시는지 보여 주려는 것이다.
---「8장. 룻기」중에서?
에스더서에 관한 분명한 사실은 어디에도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왜냐하면 관련된 문제들은 불가피하게 유대인을 돕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의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나치 독일 당시 자행되었던 끔찍한 유대인 박해와 유사하다. 내러티브에서 하나님에 관한 침묵은 저자가 하나님을 역사에서 배제했음을 의미하는가? 본서의 구조는 인과관계처럼 사건 간의 긴밀한 연관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일련의 우연의 일치들이 예측 불가능성을 의미하거나, 인생의 사건들이 우연이나 주사위 던지기(이후부터 ‘부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저자는 사건들의 유일한 원인을 사건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는가? 다른 구약 내러티브들도 사건들 사이의 관련성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사건들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예를 들면 삼하 11-20, 특히 삼하 15:15b; 창 37-50, 특히 창 45:5-8을 주목하라).
---「9장. 에스더서」중에서?
바벨론 포로 이후 공동체는 포로 이전 이스라엘의 합법적인 계승자다. 그들은 과거 유다 왕국 영토로 돌아오지만, 분명히 자신들을 북왕국 이스라엘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그들은 성전 봉헌식 때 열두 지파 전부를 위해 희생 제물을 드린다(스 6 : 17; 8 : 35). 비슷하게 느헤미야 9장에서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회상은 주로 이스라엘이 단일 국가였을 때를 다룬다(7-25절). 역대기와 마찬가지로 에스라서-느헤미야서는 열두 지파 체제의 이상적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11장을 보라).
---「10장.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중에서?
소위 역대기 저자의 보응 신학은, 이스라엘이 언제든 침체에 빠질 수 있다 할지라도, 여호와는 은혜로 그의 백성들을 대하실 것이라는 저자의 믿음에 기인한다. 이 점은 에스겔1 8장의 요지와 유사하다. 다시 말해 현세대의 운명은 과거 세대가 행한 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대기에서 회개의 시간은 항상 있다. 따라서 역대기의 보응 신학은 기계적인 보상과 징계의 율법주의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이론이 아니라, 좌절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공동체에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11장. 역대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