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130여 년의 역사에서 또 이런 위기가 있었을까 싶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비판을 넘어서는 하나의 ‘대안적 교회’를 상상하며 새로운 교회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한국교회를 꿈꾸면서 그 꿈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 p.5-6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것은 “교회란 예수를 믿는 자들만 모이는 곳인가? 아니면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갈 수 있는 곳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교회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고백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명확하게 자르고 구분할 수 있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신앙의 문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말하자면, 교회에 누구든지 올 수 있는 분위기, 곧 그가 신자이든 혹은 비신자이든 개의치 않고 교회 마당의 흙을 편안히 밟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교회를 새롭게 하는 첫걸음이 아닐까?
--- p.20-21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길 위의 신앙이다. 예수의 삶이 길 위의 삶이었고, 하나님의 나라 선포도 그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지로 한 ‘순례’--- p.pilgrimage)는 교회의 핵심가치이다. 교회가 이 순례 대신 ‘거주’--- p.dwelling)를 목적으로 할 때 교회는 그 본질로부터 멀어지면서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것이 교회사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순례를 본질로 하여 끊임없이 걸어가는 길 위의 공동체이다.
--- p.42
신약성경에서 복음서의 경우는 ‘다양성’의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더욱더 분명하다. 주지하듯이, 네 복음서는 같은 예수를 종종 서로 상충됨에도 불구하고 각각 다른 시각을 존중하는 맥락에서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매우 다르다. 전자는 예수에 대한 관점에서 유대적인 시각이 주로 반영되어 있다면, 후자는 희랍적인 시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에 대한 복음서의 시각과 바울서신의 시각 역시 같지 않다. 이처럼 다중 시선은 성경의 핵심적 시각으로서,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더 잘 조망하도록 안내해 준다.
--- p.53
지난 2천 년간의 교회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는 위대한 신앙의 발자취 못지않게 부끄러운 모습도 꽤 많이 보였다. 교회는 늘 초대 교회 때 로마의 박해에 저항하면서 뜨거운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을 자랑스러워하지만, 실제로는 믿음을 저버린 경우도 많았다. 또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라 하지만 실제로 교회의 역사는 증오와 미움의 공동체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특히 중세의 교회는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마녀사냥을 하였으며, 근대의 유럽 교회는 ‘30년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증오심을 키웠던가? 그리고 20세기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부끄러운 일이다.
--- p.132
낯선 타자, 아니 원수를 맞이하는 일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러나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공간을 안전하게 내어줄 때, 치유가 일어나고 또 공동체 밖에서 전해지는 새로운 기쁜 소식으로 인해 나의 존재 지평도 확장된다. 따라서 환대의 공동체와 안전의 공동체는 상호모순처럼 보이지만, 그 양자 사이의 상호 긴장감 속에서 유지되어야 마땅하다. 새삼 우리가 꿈꾸는 환대의 공동체와 더불어 안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깊이 묵상하게 된다. 이런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따뜻한 가슴으로 기꺼이 낯선 나그네에게 문을 열어 주는 모든 성도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 p.139
대한민국은 비록 일제의 노예 상태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집단 무의식 속에는 일제의 잔재로서 노예 의식이 뿌리 깊이 남아 있다. 게다가 실제로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미국의 식민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자유와 해방은 남북한의 주체적인 평화통일이 이루어질 때 가능할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인들은 집단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노예 의식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 p.183
개신교가 설교 중심으로 예배를 구성하다 보니 많은 부작용이 생기게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문제점은 개신교 신자들의 신앙이 ‘설교--- p.자)’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교회가 목회자를 청빙할 때 목사의 자격으로 설교를 얼마나 잘 하느냐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설교를 강조하는 분위기는 보통 1시간 드려지는 예배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율이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종종 복음 선포라기보다는 지루하고 의미 없는 훈계조의 독단적인 설교로 왜곡되기 쉽다. --- p.223-224쪽, 공동체적 설교의 공동체)
우리가 소유 곧 자본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본주의’에 살면서 ‘무소유’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모순적인 일이요 더 나아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마치 e-스포츠 경기 중 플레이어가 어처구니없이 자신의 유닛을 잃어버리는 경기를 펼쳤을 때 ‘무소유!’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삶은 과거의 축적된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한 존재 지향의 삶에 있다. --- p.249-250
이단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단은 예수 당시부터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예수 역시 이단으로 몰려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희생되었다. 그러니 이단이 그렇게 새삼스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단의 문제에 대하여 역설적이게도 긴장을 동반한 양가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우리의 신앙공동체를 파괴하는 잘못된 이단을 엄격히 반대하며 깨어서 경계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처럼 기꺼이 이단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 p.271-272
이제 우리 한국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 해답은 어느 정도 자명하다. 그것은 교회가 가나안 신자들을 돌보는 교회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교회를 떠나지 않았지만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잠재적 가나안 신자들인 현대인들의 존재론적 질문에 교회가 진실 되게 응답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교회의 내적 변화는 교회 안에 수많은 갈등과 토론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당연히 전제하는 것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 p.331-332쪽
과연 한국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유럽 교회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미국 교회만을 추종할 것인가? 필자는 이 시점에서 한국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에 따라 교회력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4대 명절--- p.성탄절, 부활절, 성령 강림절, 추수감사절)에다가 한국의 전통적인 명절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여 교회력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347-348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기독교의 자유와 평등사상의 연대는 대한민국의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를 탄생시키는 마중물이 된 것이다! 즉 대한민국은 동학과 기독교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1919년 4월 11일 3·1운동의 결과로 상해에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동학과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얼을 뿌리내리게 한 위대한 모판이 되었다.
--- p.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