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다섯 번에 걸쳐서 “주께서 나를 아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알려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 오히려 나는 몰랐다. 나는 스스로가 이런 존재인 줄 몰랐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이다.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완전성, 존재의 보편성, 행위의 전능성, 사람에 대한 심판 등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로 사람의 전인격과 모든 행위를 완전하게 관찰하시고 아시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시 139:1-6). 이어서 하나님은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아니하시고 온 우주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은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7-12).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으로 사람을 신비하게 창조하시고, 주권적 섭리에 따라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다(13-18). 다윗은 하나님과 그를 대적하는 악한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호소하며(19-22), 하나님께서 그를 살피셔서 그가 악을 떠나 영원한 길을 가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23-24). 이상의 내용을 다윗은 이 시편에서 고백하고 간구하고 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편재성, 전지성 그리고 창조성과 같은 개념을 알리려고 할 때 한 고전적인 증거로 쓰인다. 이 시는 그의 사상을 추상적인 신학적 정의에 따라 구체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의 삶이 그 속에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의 현실에 대한 개인적 경험의 영역을 통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인은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때 하나님에 “관하여”(about) 객관적으로 진술하지 않고 “나-너”(I-Thou)의 인격적 관계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에게 직접 말하듯이 아뢴다.
---「1부 생명_ 오, 주님, 주는 나를 감찰하셨고 아셨나이다」중에서
현재 우리는 산(山)과 강(江) 그리고 바닷가 등 어디를 가도 오염된 상태를 목격한다. 이러한 공해와 오염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인 자연이 신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20). 바울은 피조물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듣고 있다. 만물이 허무한데 종속되기 때문에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면서 참사람이 나타나기를 원한다는, 기발함이 바울에게 보기 드문 말이다.
서구적인 사고(思考)에 의하면, 자연과 사람을 엄격히 구별하고, 신(神)도 엄격히 구별한다. 자연은 자연대로 그 순환 원리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순환을 할 따름이고, 인간은 이 자연을 정복함에서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확신으로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최대과제로 삼아 오늘의 현실을 이루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진통, 지구가 깨지고 있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도 깨지는 지구를 방어하는 길을 또다시 사람이 자연을 정복하는 방법으로, 즉 어떤 새 기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낙관하고 있다. 이것이 서구적인 자연과의 관계에서의 인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양적인 시각(視覺)과는 전혀 다르다. 동양(東洋)은 자연 안에 사람을 포함한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에게 협동의 대상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길을 찾는 것이 삶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다. ‘인간이 숨을 쉬듯이 자연도 숨을 쉬고 인체에 맥이 있듯이 자연에도 맥이 있다. 인간은 자연 속에 있기에 자연이 병 들면 인간도 병이 든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인간보다 훨씬 깊고, 크고, 넓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에 순응해서 사는 지혜를 가질 때에만 제대로 살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동양의 자연과의 관계에서의 인식(認識)이다. 그래서 예부터 돌, 나무 하나를 함부로 꺾거나 옮기거나 혹은 자르지 않았다. 저들은 어떤 산(山)의 허리를 자르면 거기서 피가 난다고 확실히 믿고 있었다. 자연의 기(氣)가 끊기면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재앙을 당하거나 기(氣)가 빠져버린다고 생각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몸과 땅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확실히 믿었다. 소위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인데, 몸과 흙은 둘이 아니라, 자연과 나는 하나라는 그런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다.
---「2부 공평_ 겸허히 생명의 신음소리 듣기」중에서
1983년 아직 철의 장막이 다 걷히기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를 방문하여 야외미사를 인도하던 때이다. 구름 떼 같은 인파가 교구별로 질서 있게 포니아토스 다리를 건너 광장으로 행진해 갔다. 다리 정면에의 길은 공산당본부 빌딩 앞을 지나는 길이었다. 떼지어 행진하는 군중들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당신들을 용서한다. 우리는 당신을 용서한다’(We forgive You). 또 그 외에도 억압과 박해를 받을 때마다 ‘우리는 당신을 용서한다. 우리는 당신을 용서한다’는 피켓을 들고 행진하였다. 결국 폴란드 공산정권은 바로 이 ‘용서한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정신에 의해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런 용서의 몸부림은 소련과 동구 모든 나라에 확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철의 장벽의 동구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공산권의 종주국이요, 동구 제국을 장악하던 소비에트가 무너지며 발버둥 치던 아이러니한 역사의 최후 단면을 살펴보겠다. 1991년 10월, 고르바초프가 명목상의 대통령이 되고 실권은 엘친이 장악하기 시작되던 무렵이다. 러시아 지도자들이 그 나라의 도덕성 회복을 도와달라고 미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하여 일단의 미국 기독교인들이 모스코바를 방문했을 때이다. 여기 동행한 얀시(Philip Yancey)는 그때의 일들을 소상하게 그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What’s so Amazing About Grace)에서 기록했다. 고르바초프나 정부 고위 관리들은 따뜻하게 환영했고 그 무서운 소비에트의 정보부 KGB를 방문했는데 의심스러울 만큼 그 환대는 놀라웠다. 스탈린 시대, KGB는 38만 명의 사제 중에서 대부분을 살해하고 축출하여 겨우 1백 명의 사제만을 남긴 장본인들이다.
---「아불라제의 회개](Repentence by Tengiz Abuladze’s film)라는 영화를 보았다. 사실 이 영화는 KGB의 잔인성, 특히 종교를 반대하고 수십만의 사제들을 살해한 무서운 범행과 허위탄핵, 강제 투옥, 교회 방화 등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수도원 1천 개, 신학교 60개가 문을 닫고 정교회 98%가 문을 닫을 정도였다. 이 영화는 남편을 노역장에 보낸 아낙네들이 강물에 떠내려온 통나무 속에 남편들의 소식이 있을까 하여 애타게 찾는 장면과 한 시골 아낙이 교회로 가는 길을 묻는 것으로 끝이 난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하자 도대체 교회로 인도되지 않는 길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막을 내린다.
---「3부 평화_ 평화는 용서와 화해의 실현이다」중에서
아브라함의 소명(召命) 사건은 바벨탑의 거인(巨人)주의적인 오만을 가지고 끊임없이 신(神)에게 항거하는 저 구제불능의 인류를, 그런데도 기어이 구원으로 이끌어내는 일을 하여야 할 모범적 구원공동체의 한 조상(祖上), 즉 아브라함을 이 인간 역사 속에 꼭 등장시켜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구원사적 결단의 한 결과였다. …
마른 풀과 같고 시드는 꽃 같은(사 40:7-8), 길 잃은 양 같은 포로 유민 이스라엘을 목자같이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어(사 40:11), 꿈에도 그리는 그들 이스라엘의 조국으로 광복(光復)시키고 그 동터오는 새 역사를 여셨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 소명 때와 꼭 같이 그 조국 귀환의 새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서도 말씀하셨다. “보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너를 다시 일으켜 열국(뭇 민족)의 빛(a light to the nations)으로 삼았노라”(사 49:6)라고.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소명은 이젠 똑같은 언어로 반복(反復), 전이(轉移)되어 하나님의 인류구원 역사의 선구자 아방가르드(avantgarde)로, 즉 열국의 빛으로의 사명을 또다시 저 ‘포로귀환 이스라엘 새 공동체’가 위임(委任)받게 된 것이다. 목이 곧은 백성 이스라엘은 바빌론 포로의 비극이 토라를 불이행(不履行)한 죄의 결과로 알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토라에 대한 철저한 기계적/문자적으로 이행해야만 한다는 잘못된 판단으로 부름받은 자의 사명을 바르게 인식함에 실패하였다. 저들 이스라엘은 불행히도 토라에 대한 문자주의적, 기계주의적 신봉에만 전 운명을 걸고 매달렸다. 그리하여 율법주의라는 또 하나의 악을 낳고 말았다. 즉 구약성서의 히브리신앙을 왜곡시킨 유대교(Judaism)의 바로 그 범죄 현실이다. 이것은 실로 인간 역사가 겪는 지겨운 악순환(惡循環)이다. 율법주의의 이러한 ‘이기적 배타주의 교조’라는 또 다른 거인주의적인 오만(titanic hubris)이 우리의 종교역사 속에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유대교(Judaism)는 바로 이러한 오만이 낳은 대표적 산물이다. 유대주의적인 배타적 율법주의의 이 악(惡)은 마침내 로마제국의 속국이 되게 한다. 그리하여 구약성서에 나타난 복음적 진리를 왜곡 해석하는 유대교의 근본주의 교조주의 신앙을 바로 잡으려고 올바른 성서해석으로 맞서서 싸우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4부 복음과 민족_ 아브라함 ? 탈출의 신앙과 영문 밖의 제단」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