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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새에 관한 명상

도요새에 관한 명상

문지작가선-08이동
리뷰 총점9.6 리뷰 5건 | 판매지수 1,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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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3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497쪽 | 572g | 128*207*24mm
ISBN13 9788932038247
ISBN10 8932038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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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아버지 얼굴을 본다. 아버지 얼굴은 피칠갑을 한 채 표정이 찌그러져 있다. 눈을 부릅떴다. 턱은 부었고, 입은 커다랗게 벌어졌다. 아버지가 저렇게 변해버렸다는 걸 믿을 수 없다.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만 같다. 낡은 검정색 국민복 단추가 풀어진 사이로 보이는 아버지 가슴은 내가 어릴 적, 그 무릎에 앉아 재롱을 떨던 가슴이다. 이제 아버지 가슴은 그 두려운 보라색으로 변하고 말았다. 두 팔과 다리는 아무렇게 내던져졌다.
--- p.36 「어둠의 혼」 중에서

전쟁은 모든 걸 망쳐. 전쟁을 통해 통일을 도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영구적인 분단이 오늘을 살기에는 편해.” 내 말을 형이 반박했다. “너희 세대는 통일의 중요성을 몰라. 그런 사고방식을 갖게 된 건 잘못된 교육 탓이야.” 형 말에 아버지가 머리를 주억거리며, 모든 게 오늘의 교육 탓이라고 했다. 이 물량 위주의 자본주의 사회가 젊은 애들을 나쁜 쪽으로 몰아가서 가치판단의 기준을 잃게 했다며, 교육계에 몸담았던 티를 냈다. “통일을 외치는 아버지나 형보다 저희들은 통일에 무관심한 세대죠.” 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인간은 정직이 중요한데 네 생각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 말에 잘못은 없었다. 아버지는 정직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 p.56 「도요새에 관한 명상」 중에서

연 장사가 괜찮은 장사거리가 될 리 없었다. 다음 일요일에 순희와 내가 스무 개 연을 들고 저수지 공터로 나갔지만 판 연은 겨우 네 개였다. 미끼로 지렁이나 떡밥을 파는 장사보다 못했고, 낚시꾼들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연 팔이가 왠지 부끄러웠다. 그때도 아버지는 집에 머문 지 두 달을 못 채워, 북으로부터 도요새, 들오리, 물떼새가 몰려들어 주남저수지가 새 떼 울음으로 분답시끌해질 무렵, 철새처럼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해도 저문 세모가 임박해서야 예의 초라한 행색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또 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저건 증말 무신 늠으 미친 짓인지 모르겠다며 아버지를 원망했으나, 아버지가 연을 만드는 일을 방해하진 않았다. 아버지가 돈 한 푼 벌어들이지 않았지만 엄마는 늘 그 정도의 잔소리로 타박을 그쳤다.
--- p.133 「연」 중에서

말다툼이라면 서로 삿대질하며 맞대거리해야 마땅하나 두 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 쪽에서 먼저 발작적으로 할머니의 마땅치 못한 행동거지를 두고 험구했고, 그러면 할머니는 조개가 아가리를 다물듯 침묵으로 며느리의 그 따가운 수모를 묵묵히 견뎌냈으니, 다툼은 일방적이라 말해야 옳았다. 제 분에 못 이긴 어머니가 새삼스레 옛 모화 시절의 케케묵은 과거까지 꺼내어 짧게는 10여 분, 길게는 30여 분을 할머니와 아버지까지 싸잡아 닦달을 놓다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 때까지, 할머니는 자리 뜨지 않고 돌아앉아 그 말을 죄 새겨들으며 담배질로 응어리진 한을 눌러 삭였다.
--- p.152 「미망」 중에서

“강정댁이 지 새끼 몸 씻기는 거 보모 사람을 쥑이드키 하는 기라. 털 뽑은 달구 새끼가 따로 읎구로 얼매나 쌔기 씻기는지 아아 새끼를 빨갛게 맹글어놓는다 카이” 하고 말할 정도로, 어머니의 자식 몸 씻기기는 어떤 면에서 일종의 고문이었다.
해 질 무렵이 되어 어머니가 진영을 떠날 때까지 내가 어머니로부터 당해내야 할 두 가지 일로 나는 이래저래 풀이 죽어 그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마 칵 죽어뿠으모, 할 정도로 살기가 싫어져 멍청하게 앉아 있자니 불난 데 부채질하는 꼴로 오줌까지 마려웠다. 방 안에는 요강이 없었고 벗고 앉은 몸이라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무슨 재미있는 궁리를 생각해내야 할 텐데 떠오르는 감도 없었다. 한참을 무료하게 앉아 있다 겨우 짜내게 된 생각이, 바로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내가 곧 끌려가게 될 목욕탕이었다.
--- p.201 「깨끗한 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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