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의 인간들에게 삶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어나면 땅을 파고, 하루 종일 배고파하고, 지치면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면 땅을 팠다.
회색 인간들의 입은 말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고, 귀는 듣지 못하는 듯했고, 눈은 그저 죽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인간들을 살아 있는 송장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아쉬웠다. 이곳을 무의미의 지옥이라고 부르기에도 아쉬웠다. -
-- 1권 「회색 인간」 중에서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 기억나? 준비하지 않으면, 겨울이 왔을 때 얼어 죽을 수밖에 없어. 10년 뒤 주위 사람 모두가 30살인데 우리만 나이를 먹어가면 어떡해? 친구들은 젊은 몸으로 경쟁력 있게 일을 하고, 놀기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그럴 때 우리만 늙어가면 어떡해? 오빠는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게 두렵지도 않아?”
--- 2권 「개미 인간, 베짱이 인간」 중에서
“정답? 정답은 없습니다.”
“뭐? 그럼 왜! 왜 내가 탈락이야! 왜 우리가 탈락이야!”
“소수니까.”
“뭐?”
“도덕이 무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도덕이란 건 인류가 만든 겁니다. 절대다수가 곧, 정답이지요. 하하.”
--- 3권 「도덕의 딜레마」 중에서
“119죠? 제가 지금 자살 중입니다…”
병원에서 깨어난 그는 허탈했다. 내내 이렇게 억지로 살아야만 하는 걸까, 더 우울해졌다.
그의 소식을 접하고 찾아온 사람들은 그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그는 받아들였다. 자살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 자살을 못 하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 4권 「평점 10점」 중에서
아내가 죽었다고 해서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일만 하느라 아내에게 신경 쓰지 못한 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솔직히 아내보다는 회사가 더 중요했다. 그렇다고 아내의 교통사고가 내 탓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아내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는데, 나도 모를 죄책감이 조금은 있었나 보다.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 5권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중에서
“말씀하신 대로, 컴퓨터 속에 존재하는 인류의 데이터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혹, 영화 〈매트릭스〉처럼 가상의 지구를 서버상에 구현해낼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완벽한 지구를 만들기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뇌와 서버를 연결한다면? 살아 있는 인간의 무의식 공간과 가상현실이 합쳐진다면? 보시다시피.”
김남우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이렇게 맛있는 홍차 맛을 느낄 수 있게 됐죠.”
--- 6권 「하나의 인간, 인류의 하나」
정재준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자살하는 법을 검색했다. 은밀하게 숨어 있는 자살사이트도 찾아다녔다. 진짜 자살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동정받고 싶었을 뿐이다. 자살 소동으로 사람들의 동정을 받고 싶었다. 불쌍하게 여겨지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그랬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해주고 신경 써줘야만 했다. 학교에서 누군가 손가락을 다치면, 자신은 더 크게 다쳐서 대우받아야만 하는 인간이었다. - 7권 「동정받고 싶은 남자」
[전 세계에서 수많은 시민분들이 선물과 응원 물품을 보내주시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밖에 없다고들 하시지만, 그 마음이야말로 가장 큰 힘입니다. 우리는, 인류는 반드시 이겨낼 겁니다.]
--- 8권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저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나쁘지 않은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훔치지 않으면 손해 보게 되었고, 꼼수를 이용하지 않으면 멍청이라 부릅니다. 양보와 배려는 철이 없는 것이고, 속임수와 사기는 현명한 것이 되었습니다. 제발 훌륭하신 선생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 9권 「평범한 사람도 훌륭해지는 행성」
“이곳에서 주어진 선택지의 공통점을 알겠습니다. 인생에서 제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 제가 살면서 겪은 그 불행한 것들은 모두 제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력한 저의 잘못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저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었군요.”
--- 10권 「모두 다 결정되어 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