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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 (큰글자도서)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 (큰글자도서)

손홍규 | 창비 | 2021년 03월 0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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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3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324쪽 | 189*272*30mm
ISBN13 9788936438401
ISBN10 8936438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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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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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볼 줄 아는 노인의 기이한 능력은 자식들을 비롯해 노부인까지 혼란스럽게 했지만 누구보다 노인 자신이 혼란스러웠다. 노인은 잠을 자다가 보았고 눈을 뜬 채로도 보았다. 옛사람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나 말을 건넸고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풍경이 떠올랐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고함 혹은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눈이 부실 만큼 환한 빛이 노인 앞으로 왈칵 다가오다가 깜깜하게 물러나기도 했다. 그 많은 장면 중에 정작 노인이 간절히 알고 싶던 것들은 별로 없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 몰라도 괜찮은 것들이 더 많았다.
--- p.25 「예언자」

출상을 앞둔 새벽이었다. 아내는 유족대기실에서 잠을 청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잠든 아내와 조금 떨어져 누웠다. 익숙한 아내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옛사랑이 되어버린 아내 옆에서 이룬 마지막 단잠이었다.
--- p.74 「옛사랑」

그는 눈을 맞으며 휴대폰으로 노 파사란을 검색했다. ……너희는 여기를 지나가지 못한다. 그는 노인의 알려진 이력과 알려지지 않은 이력 사이의 심연을 느꼈다. 여기까지 힘들여 책상을 끌고 나오게 할 만큼 그를 사로잡았던 기이한 분노가 그의 머리, 어깨, 팔뚝에 잠깐 머물렀다가 녹아버리는 눈송이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 p.93 「노 파사란」

아내는 이제 물류창고의 화재 사고만이 아니라 건설현장의 매몰 사고, 추락 사고와 같은 산업재해부터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처우, 알바생의 부당해고에 이르기까지 아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는 사람처럼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와 아내는 이런 방식으로 멀어지는 중이었고 그에게는 이 모든 일이 터무니없게 여겨졌다.
--- p.206 「저녁의 선동가」

음식 재료를 만졌을 뿐인데 구역질이 난다는 건 내 배 속에 아이가 들어설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다른 무언가가 생겨났다는 뜻이겠지. 나는 무얼 잉태해버린 걸까. 내가 이 나이에 잉태할 수 있는 건 분노 말고 뭐가 더 있을까. 옛사람들이 흔히 한이라고 불렀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이라는 말은 왠지 체념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여겨져. 나는 오래도록 체념해왔으니 체념이 다져지고 굳어져 생긴 한이라 하기에는 억울해. 그렇게 굳어지고 굳어진 체념이 더는 체념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왔을 뿐이야. 그러니 분노 말고 뭐가 더 있겠어. 그런데 대체 무얼 향한 누굴 향한 분노지. 내가 나 아닌 다른 누구에게 분노를 품을 수 있겠어. 결국 그건 나일 수밖에. 어쩌면 그가 느낀 것이 진실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 p.296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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