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우리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한다고 해서 부정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듯 이야기합니다. 이방인과 한자리에서 먹으면 적법한 정결 절차를 따르고 나서야 가족들과 다시 식사할 수 있다는 것이 율법의 규정인데, 그는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그의 주장이 불합리하다고 수없이 이야기했지만, 그가 들은 척이나 했나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가 우리 이야기에 귀 기울일 이유가 있겠어요? 그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의 주장이 초래할 피해는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저 결정을 내릴 뿐이지만, 나머지 우리는 그 결정이 가져오는 결과를 감당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는 편하게 앉아 있으면 그만이에요.
---「유대인 그리스도인인 헤로디온이 바울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대목 (4장)」중에서
우리는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했습니다. 유대인이 모두 떠났는지 확인하려는 병사들이 급습하기도 했어요.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잘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친구 중 몇 명은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군인들에게 맞아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가고 없을 때, 당신들 없이도 우리끼리 잘 지냈어요. 우리는 조용하게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린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았어요.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살아남아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죽자, 당신들 유대인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을 그리워했다고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당신들과 함께라면 우리가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이제 당신들은 밖으로 나가 분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로마의 심장에서 위험을 자초하고 있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머리를 숙이는 겁니다. 규칙을 따르세요. 그들의 시야에 우리가 들어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 바드로바가 위험한 선교 행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대목 (5장)」중에서
잠시 후 대화가 진지해졌어요. 그들은 ‘성경’이라 부르는 것을 읽었어요. 그것은 신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어떤 신이라고 특정하진 않았는데, 자기 백성을 위로하길 원하는 신이었어요. 그것이 제게는 매우 신답지 않은 행동으로 다가왔어요. 신들은 이유도 없이 변덕을 부리며 우리 운명을 바꾸고 우리 인간을 그저 그들의 놀잇감 정도로 대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요.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들이 읽은 본문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어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에게 그 본문이 어떤 의미인지도 이야기하더군요. 저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사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어요. 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 저는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심지어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처음 듣는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하거나 그들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말하는 내용을 크게 선언할 때조차도 그 편안하고 안전한 느낌이 약해지지 않았어요. 나중에 그들은 빵과 컵을 들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요. 어떻게 그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그의 마지막 명령을 따라 그를 기념하기 위해 이런 의식을 행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금 우리는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이 의식을 행하는지 이야기했어요.
---「뵈뵈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 모임에 처음 참석했을 때를 묘사하는 장면 (12장)」중에서
가끔 나는 우리가 용서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옳은지 궁금해집니다. 용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도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했으니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의 가장 중심입니다. 문제는 당신이 방금 말한 것처럼 우리가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용서가 너무 쉬운 것처럼, 심지어는 진부하게 들린다는 겁니다. 마치 말 한마디로 과거가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지워질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된다는 겁니다. 저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도 용서가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대목 (20장)」중에서
나는 제국의 열기가 로마를 장악할 때 벌어진 일들을 잊고 있었다. 오랫동안 멀리서 떨어져 살 때는 고향이 몹시 그리웠다. 로마의 아름다움과 영광, 로마의 장엄함과 화려함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은밀한 곳에서 벌어지는 사악함은 잊고 있었다. 때때로 권력의 통제가 너무나 지독해서,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그 통제 아래로 들어간다. 중심에 있는 우리 모두도 두려움에 지배당하게 되고, 나의 옛 친구라는 자들도 그들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라면 재고의 여지도 없이 네로의 미친 광기 앞에 날 던져버릴 거야.
그것이 바로 결국에는 내가 그 모든 것을 등지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선 이유란다. 그분의 길은 온유함과 사랑이다. 반면에 로마의 길은 공포며 힘이다. 예수님의 평화는 온전함에서 비롯되지만, 로마의 평화는 잔혹한 억압에서 비롯된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자신을 쏟아 부으셨지만, 로마와 그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거나 원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물어뜯고 싸운다. 과거에는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안다. 그 선택에는 분명 뒤따르는 결과가 있지만, 난 그쪽을 선택했고, 이제 그 결과들이 우르르 모여들고 있다. 그런데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귀족인 티투스가 세례를 받은 후, 앞으로 닥칠 박해를 예상하면서 하는 말 (25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