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 특히 북미의 그리스도인들이 이토록 토마스 머튼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그의 영성이 무엇이기에 배우려 하는 것일까?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술과 담배를 즐기고, 무책임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으며, 심지어 사생아의 아버지였다는 말도 있었던 머튼. 수도생활 중반기에는 아빠스와 수없이 마찰을 일으키며 갈등했고, 50대에 접어들면서는 젊은 간호사와 사랑에 빠진 그를 왜 사람들은 존경하고 칭송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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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한 머튼의 참여는 무엇보다 ‘인간 의식의 변형’에 초점이 맞춰졌다. 자신의 종교 안에서 먼저 자기변형과 내적 성숙을 이룬 이들이 사회참여와 종교 간 대화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머튼의 사회정의를 위한 외침과 영적 연대는 오늘날 교회의 사회참여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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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튼은 서양의 관상가들과 깨달음을 얻은 동양의 스승들 사이에서 종교적 체험의 합류점을 발견했다. 그는 선의 스승들 사이에서 참된 신비주의의 가능성을 구상했으며, 서양 신비주의의 범주를 넘어 표현된 그들의 체험이 그리스도교 영성을 풍성하게 하는 재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적 체험의 가치를 발견하고 내적 체험을 묘사하기 위해 두 전통으로부터 상호 호환적인 용어를 적절히 찾아낸 일은 머튼의 종교 간 대화, 특히 불교와의 대화를 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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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공이요 모든 것은 자비’라는 그의 묘사는 어쩌면 하느님 체험이 그리스도인의 뼈대일 뿐만 아니라, 불자들 안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고 제안하고자 했던 그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에서 다루는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님(the All and the Nothing / todo y nada)이라는 그리스도교의 변증법’과, 깨달음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공에 대한 불자들의 이해를 반향한다. 머튼은 자기비움의 체험을 통해 다른 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것 안에서 신적 현존을 마주했고, 또한 모든 존재의 바탕인 사랑과 자비의 충만함을 찾았다. 해탈과 유사한 이 강력한 체험은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교차하는 종교 체험’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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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자기희생적 사랑을 통해 드러난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에 기초한다. 그리스도교 사회운동가들은 사람들의 해방에 참여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한다. 머튼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일 사이의 관계를 관상으로 묘사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관상 안에서 자기비움과 완벽한 충만을 통해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 사랑을 실현할 수 있고, 다른 이들과 거룩한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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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수도생활의 쇄신은 수도생활 구조의 변화나 개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내적 변형에 있다고 머튼은 주장했다. “수도생활에서 본질적인 것은 건물이나 수도복에 내장되어 있지 않으며, 심지어 꼭 규칙 안에 끼워 넣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한 내면의 변형과 관련된 일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이 목적을 위해 존재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들은 내적 회개,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게 하는 철저한 내적 변형의 경험을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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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은 수도승?수행자 간의 관상적 대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아시아의 종교 전통에 관한 그의 열정은 지적인 대화를 넘어 체험과 영성과 삶의 대화 형태인 ‘수도승?관상가 간 대화’를 개발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가 다양한 불교 수도승들, 수행자 및 관상가들과 직접 만나고 아시아에서 그들의 수행처를 방문한 것은, 수도승?관상가 간 대화에 대한 그의 관심과 참여를 더욱 깊게 했다. 비록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수도승?관상가 간 대화에 관련된 생각들을 충분히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러한 형태의 대화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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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전통, 특별히 선과 만나면서 머튼은 관상적 대화가 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는 초종교적 의식으로서의 선이 그리스도교를 포함하여 모든 아시아 종교 전통 안에 있는 ‘관상적 핵’을 표현하고 있다고 여긴 것 같다. 비록 각각의 종교들이 선의 깨달음, 힌두교의 삼매, 도교의 무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의 일치 등과 같이 관상이나 해탈의 체험을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표현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우선 목표는 ‘궁극적 자기초월’이나 ‘자기변형’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머튼은 인간 의식의 변형과 영적 해방을 위해 관상적 차원에서 다른 종교 전통과의 대화를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많은 종교 전통의 ‘관상적 핵’이 깊은 영적 차원에서 종교 간 대화를 지탱할 수 있는 것임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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