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재명 기자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1980년대, 광주의 충격 속에 젊은 사학도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현대사 공부를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때 그는 『정경문화』 기자로 활동하면서 이승만의 정적 최능진에 이어, 김성숙, 김창숙, 장건상, 정화암, 유림, 조완구 등을 소개하는 글을 연달아 게재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현대사 연구가 황무지 상태여서, 현대사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이 최능진이 누군지, 김산의 『아리랑』에 나오는 금강산의 붉은 승려 김충창이 혁신계 김성숙이었는지도 모를 때였다. 『정경문화』에 실린 중간파 인사들에 대한 김재명 기자의 글을 밑줄 쳐가며 읽고 또 읽던 기억이 지금도 삼삼하다. 그 기사들은 곧 『한국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이란 책으로 모아졌다.
그 후 김재명 기자는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팔레스타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카슈미르, 동티모르, 캄보디아, 보스니아와 코소보,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남북아메리카 지역의 볼리비아, 쿠바 관타나모, 그리고 미국 등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으로 뛰어들었다.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파헤치던 그가 지구촌 곳곳을 찾아다니며 그 고통과 비극을 전하는 분쟁지역 취재기자가 된 것이다. 그동안 『오늘의 세계 분쟁』, 『석유, 욕망의 샘』,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시리아전쟁』 등 여러 권의 분쟁지역 관련 저서를 낸 김재명 기자가 이제 신간 『일본의 전쟁범죄』를 갖고 동북아와 한반도로 돌아왔다.
『일본의 전쟁범죄』는 조금 더 빨리 출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오늘 우리 현실에 꼭 필요한 책이다. 2004년 처음 등장하여 한때 반짝했다 사라졌던 뉴라이트들이 친일 정권의 광기 어린 인사로 교육과 역사와 관련된 주요 국가기관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친일 행위가 부끄러운, 그래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면, 민주화 이후 뉴라이트들은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번영은 일본과 일본으로부터 신문물을 열심히 배운 친일파 덕이라며,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넘어 훈장을 주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일본의 전쟁범죄』는 일본의 식민 지배와 전쟁 수행 과정에서 어떤 범죄가 저질러졌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와 전쟁범죄라는 주제에 관한 서술은 한국인들에게는 아무래도 민족주의적 편향이 강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김재명의 신간이 갖는 강점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좁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전 세계 분쟁지역을 돌아본 경험에 바탕을 둔 보편적인 관점에서 고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재명은 “아프리카나 중동, 발칸반도 같은 분쟁지역을 취재하면서 폭력과 죽음이 일상화된 모습들을 보긴 했지만, 막상 일본의 만행 기록들은 훨씬 끔찍했다”라고 술회했다.
나아가 이 책은 전범국가인 일본을 타협적이고 선택적인 방식으로 응징한 ‘미국의 잘못된 전쟁 행위’에 대해서도 철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김재명은 가해국 일본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과거의 식민 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해 반성도 사죄도 않고 있는 점에 극히 비판적이지만, 도쿄 대공습이나 두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 민중들이 입은 피해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미국이 도쿄 전범재판 등에서 단죄한 똑같은 전쟁범죄가 미국에 의해 일본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베트남, 나아가 미국이 개입한 수많은 분쟁지역에서 저질러졌음을 독자들도 기억해줄 것을 요구한다. 나만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평화로 한발 다가가는 고통의 연대의 출발점이다.
이 책에 서술된 내용과 구체적인 사례들은 읽어나가기 힘들 만큼 참혹하고 어둡고 무겁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김재명 기자가 일본의 전쟁범죄를 깊이 살펴보게 된 것은 “동아시아의 어두운 과거사가 지닌 문제점들을 제대로 아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촛불’ 이후 한국 사회는 수십 년째 준전시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한국전쟁이라는 어둡고 긴 터널의 출구에 다가서게 되는 줄 알았는데,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뒤 제2의 한국전쟁의 입구에 서 있게 되었다.
김재명 기자는 세계의 분쟁지역을 다닐 때 “아득한 절망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소수자와 약자, 못 가진 자들의 정의가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쪽”에 확고히 서 있었다. 역사 교과서에 대한 공격으로 대표되는 뉴라이트들의 준동은 결국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떤 세계관을 갖게 만드느냐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다. 한국사회는 지금 ‘중일마(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로 살 것인가, 아니면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로 살 것인가를 놓고 치열한 쟁투를 벌이고 있다. 이 어두운 시대에 김재명의 『일본의 전쟁범죄』는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왜 ‘중일마’의 자세로 살아서는 안 되는가를 절절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