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원로 연극인의 내면 고백
우리나라 근대 공연예술사가 120여 년의 역사를 갖는 동안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했지만, 어느 배우 한 사람도 자신이 걸어온 연극의 행로를 소상하게 기록해 놓은 경우는 아직 없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중진 배우 권병길 씨가 상재한 《배우 권병길, 빛을 따라간 소년》은 희귀하면서도 소중한 공연사의 자료가 되리라 본다.
권병길 씨는 평생 무대와 스크린에 큰 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적잖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세칭 스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도 분명히 밤하늘의 별인 것만은 분명한데, 초저녁에 잘 보이는 화성이나 금성처럼 잘 보이지 않는 은하수 속의 작은 별이어서 그렇다.
그는 평생 수백 편의 연극과 영화에서 자기 역을 충실히 맡아했지만 주역으로서 작품을 끌고 간 것이 아니고 뒤에서 뒷받침해 주거나 밀어 주는 조역을 주로 했기에 여간 주의 깊게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배우다.
실생활 면에서도 어떤 모임에서건 그는 항상 앞자리보다는 뒷자리에 서 있거나 앉아 있어 유심히 보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지나치게 된다. 그만큼 그는 성격적으로도 소심(?)하고 겸손하며 소극적이다. 이처럼 그가 주역 배우도 아니고 또 성격적으로도 활달하게 나서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못 되고 매스컴의 조명도 제대로 받지 못한 작은 별, 보일락 말락 하는 은하의 작은 별이 된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잘 나서지도 않고 스타성이 부족한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생각이 깊은 경우가 적잖다는 것이다. 권병길 씨야말로 그런 대표적인 배우가 아닐까 싶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는 사색형 배우이며 예술지상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이번 책이 여러 측면에서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그는 연극배우이기 이전에 깨어 있는 이 땅의 한 지식인으로서 그동안 겪어 온 이야기를 진솔하게 서술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굴곡진 현대사의 측면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또한 그가 충남 청양이 고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향으로서 20세기 최고의 배우 황철을 추억하게 되고, 이것은 다시 이데올로기와 분단 문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으며, 이는 우리 시대의 실존적 문제까지를 사유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그가 우리의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천착하면서 예술지상주의자가 될 수 없는 배경이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그는 유년 시절에 우연히 영화를 접한 것이 인연이 되어 평생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맺은 다양한 인물들과의 애환을 흥미롭게 서술한 것도 돋보인다. 따라서 나는 우리 현대사의 한 측면과 공연예술사가 뒤엉켜 있는 이 책이야말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가능성이 농후하여 자신 있게 추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