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의 영역에서 전방위로 활약하다가 이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윤이나의 첫 장편소설은 남다르다. 먼 길을 다녀온 이의 외투에 묻은 씁쓸하면서도 다채로운 향이 느껴지고, 그 아래로는 매일의 일로 다져진 단단한 잔근육 같은 것이 만져진다. 윤이나 특유의 맛깔스러움이 픽션의 제약 없는 세계에서 한층 돋보인다. 무엇보다 누구든 피해 갈 수 없는 실패와 파국, 그리고 가까스로 가능한 전환에 대한 이야기라 마음이 닳아버린 날에 골라들고 싶다. 표면의 기발한 비현실적 장치들 틈을 파고들면 깔깔한 현실의 진짜 얼굴이 기다리는 근사한 소설이다.
기립 박수를 보내고 싶은 방대한 역작이다. 케기 커루가 온 힘으로 그린 큰 그림을 보고 나면 우리 문명과 야생의 관계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정교히 짚는 일이 가능해진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관계가 이대로 지속될 리 없다. 이 책에는 절멸에 대한 절망뿐 아니라 회복을 향한 의지가 함께 담겨 있기에, 읽고 나면 더 힘찬 걸음을 옮기고 싶어진다. 덧붙여, 당당하고 신랄한 문체도 근사했다. 비인간 존재를 사랑하는 모두에게 권한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뒤늦게 세어보니 아홉 번이나 용기를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미워하는 건 아닌데, 감정이 남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참 죽이기 딱 좋은 캐릭터였다. 용기를 닮은 인물이 꼴깍, 마지막 숨을 넘길 때 작품의 완성도가 올라갔다. 어딘가 유머러스하면서도 어둡고 멋진 장면 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리딩스타트
'이제 하주라고 부르지 마, 그거 내가 아니잖아.'이번에도 수긍했다. 주연이를 하주라고 부르는 건 부르는 나나 불리는 주연이나 둘 모두에게 잔인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이제 그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연이가 내 양 귀를 잡고 냄비를 들듯 끌어당겼다. 한 손을 옆으로 뉘어 눈을 가리더니,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입을 맞쳤다. 놀라서 크르륵, 거품 품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나랑 입술이 똑같았으니까. 얇고 모양 없고.'그건 석달 후면 아무렇지않아질 작별인사였다.하주의 작별인사였다.
연고가 없다는 데에서 오는 편안함이 있다는 걸 찬겸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 어떤 풍경 이상의 심상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 거기서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것. 그 지역의 문제와 사건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 우리는 부지런히도 찬겸이네 집들이를 다니면서 지역 특산물을 먹고 찬겸이네 휑한 집에 필요한 물건들을 들여놓았다.
이상하게도 주완이를 생각할 때의 풍경은 매일 딛는 땅이 아니라 마이클 케의 사진집 속 같다.선과 면으로 풍경이 있고, 점 두개로 하주와 큰 개가 있다. 씻기기 전인 큰 개는 짙은 회색 점이다. 두 점은 별로 움직이지 않다가 그 소리가 들리자 둘이 함께 조금 커졌다 작아진다.
사실 불운은 늘 기분 나쁘게 도사리고 있었다.잠시라도 잊으면 말도 안되게 끔찍한 짓을 저질러 우리를 환기 시킨다. 아주 가까이에 있어 이만큼 널 흔들어 놓을 수 있어. 쉽게 죽일 수도 있어. 그런 식으로 난데없이 공격받으며 살아가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런 불운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이기도 하다.
#리딩스타트이십 대 내내 가장 힘들게 배운 것은 불안을 숨기는 법이었다고 말이다. 불안을 들키면 사람들이 도망간다. 불안하다고 해서 사방팔방에 자기 불안을 던져서는 진짜 어른이 될 수 없다. 가방 안에서도 쏟아지지 않는 텀블러처럼 꽉 다물어야 한다. 삼십 대 초입의 재인은 자주 마음속의 잠금장치들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