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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44
효진 알다시피, 은열 옥상에서 만나요 보늬 영원히 77 사이즈 해피 쿠키 이어 이혼 세일 이마와 모래 해설|허희 추천의 말|이언희 새로 쓴 작가의 말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
鄭世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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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당신은 나랑 결혼해서 다행이지? 나는 전혀 가부장이 아니잖아.”
“글쎄.” “나처럼 가부장이 아닌 사람이 어딨다고?” “당신 한 사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예를 들어 지난 제사 때 생각해봐. 나는 조퇴하고 가서 아홉시간 일했지. 당신은 퇴근하고 와서 한시간, 절 몇번 하고 과일 집어 먹고 사촌동생들이랑 논 게 다잖아.” “그럼 두 사람 다 조퇴했어야 했다고?” “내 말은 그런 시간들이 계속, 평생에 걸쳐 쌓인다는 거야. 쌓이다보면 큰 차이가 나는 거고. 따져보면 이상하지 않아? 당신 할아버지 제사잖아? 난 만난 적도 없는 분이야. 왜 효도를 하청 주는데?” “하청이라고까지 말하면……” “아홉시간 일한 며느리들은 제사 지낼 때 아무도 절 안 하고 뒤에 멀뚱멀뚱 서 있지.” “몇년 전에 며느리들도 절하는 걸로 바꿀까 했었는데 큰어머니 무릎도 안 좋으시고……”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주 많아.” --- pp.33-34 「웨딩드레스 44」 중에서 혹시 나의 특장은 도망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타고나게 잘하는 일은 다르잖아. 그게 내 경우에 도주인 거지. 참 잘 벗어나는 사람인 거야. 상황이 너무 나빠지기 전에, 다치기 전에,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빠져나오는 사람. 타이밍과 속도를 조절해서 탈출하는 사람. --- p.69 「효진」 중에서 알다시피 밴드는 나의 어떤 강박관념을 내려놓게 만든다. 하다가 안 되면 노래로 만들지 뭐, 하고 방향 전환을 하게 해준다. 그런 나약하면서도 나약하지 않은 이상한 방식으로 힘이 된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던 복사뼈에 관한 꿈에서도 해방되었다. 언젠가 또 굉장한 이야기가,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이야기가 안테나에 걸려 나를 사로잡는다 해도 환태평양이 내 편인 이상 문제없다. 논문이 되지 않으면 노래라도, 노래가 되지 않으면 농담이라도 된다는 것을 아는 이상 괜찮다. --- p.101 「알다시피, 은열」 중에서 언니들이 아니었으면 난 정말 뛰어내리고 말았을 거야. 경영지원부의 명희 언니, 편집기자인 소연 언니, 제작물류부의 예진 언니. 세 사람은 마치 운명의 마녀들처럼,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주었어. --- p.108 「옥상에서 만나요」 중에서 “회사에 속해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죽는구나. 뭐가 그사람들을 몰아붙인 거지?” 규진이가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생계?” 매지가 약간 쏘아붙이듯이 대답했다. “회사는 악독하지만, 어떨 때는 갑옷이기도 하잖아. 조직 밖의 사람들은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혼자 세상이랑 싸운다고.” --- p.148 「보늬」 중에서 “곶감은 먹으면 안 돼요.” “잠깐 …… 햇빛, 십자가, 은, 말뚝 그런 게 아니고?” “응, 곶감만.” “이해 안 되는데?” “그럼 호랑이들이 정말로 곶감을 무서워했겠어요? 곶감은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효과가 입증된 언데드들의 독약이에요. 한때 엑소시스트들이 쓰던 성수 일부는 곶감을 담가둔 물이었다니까.” “그냥 …… 말린 감이잖아.” “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런 거 아닐까? 죽었는데도 맛있잖아요, 곶감은. 곶감도 언데드니까 언데드가 같은 언데드를 먹으면 안 되는 원리 아닐까 싶어. 광우병 비슷하게요.” --- pp.171-172 「영원히 77 사이즈」 중에서 여자친구와 선배들은 다니던 신문 -방송사의 비리와 부실경영을 보도했고 그 때문에 해직당했다. 휘슬 블로어가 피해를 보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나는 상상 속에서 여자친구의 입에 진짜 휘슬을 물려보았다. 은색 조그만 휘슬, 여자친구가 볼을 부풀리자 새소리 비슷한 게 났다. 여자친구에게 맞춤이었다. 옳은 불화라는 것도 있을 테다. 옳은 불화로 기우는 개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할 테다. 여자친구는 마치 희귀 새 같았다. 그토록 소중한 존재를 왜 원하지 않는지, 왜 괴롭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 p.221-222 「해피 쿠키 이어」 중에서 “그냥,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란 생각을 했어.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 게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동산만 가지고 살아보고 싶어서.” --- p.253 「이혼 세일」 중에서 “불만스럽게도, 귀국의 귀염둥이를 살해한 반역자가 어제 탈옥했습니다.” 이마는 ‘불만’과 ‘불미’를, 또 ‘귀염둥이’와 ‘장군’을 헷갈리고 말았다. 30년은 대식국 말을 잊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두 사람을 맞으러 간 대식국 대신들과 모래는 머릿속에서 그 당황스러운 말을 잠시 꿰어 맞춰야 했다. “그래서 제안하는바 함께 추론을 합시다.” “…… 추격을 하자는 말씀이지요? 편하게 소식국 말로 하시면 제가 전하겠습니다.” --- p.277 「이마와 모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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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긴 자리에 앉은 당신에 대한 염려,
그런 마음이 만들어낸 단단한 연대의 이야기 표제작 「옥상에서 만나요」는 직장에서 부조리한 노동과 성희롱에 시달리며 늘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나’가 회사 언니들의 주술비급서를 물려받고 마침내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야기 표면에는 주술비급서가 있지만 ‘나’를 버티게 한 힘은 사실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주었”(108면)던 사람들,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않게 막아준 언니들인 셈이다. 해서 ‘나’는 “내 후임으로 왔다는 너”를 염려하며 ‘너’가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131면) 발견해주기를 바란다. 내가 떠난 자리에 앉을 누군가에 대한 염려는 그 마음만으로 단단한 연대의 힘을 만들어낸다. 같은 드레스로 연결된 여성 44명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 「웨딩드레스 44」는 한벌의 드레스를 빌려 입고 결혼한 혹은 결혼할 여성들의 이야기를 44개의 짧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펼쳐낸다. 낭만적 신화가 아닌 제도로서의 결혼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작품에는 다양한 여성 서사가 등장하는데, 특히 이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입은 여성이 고등학생들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들이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할 때쯤에는, 혹은 하지 않을 때쯤에는 과연 어떤 풍경이 그려질 것인가. 초판과 개정판 출간 사이 7년이라는 짧지 않은 간극이 있음에도 이 에피소드가 오늘날까지 시의성을 갖는 것은, 물론 한국 사회가 크게 변하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이토록 짧은 이야기에도 본질을 파고드는 작가의 통찰력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혼한 뒤 집 안의 물건을 모두 처분하는 ‘이혼 세일’을 열게 된 ‘이재’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혼 세일」에는 “40대가…… 50대가 보이질 않아. 선배들 다 어디로 사라졌지?”(241면) 물으며 여성으로서 느끼는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있고,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근사하고 자신만 지옥에 버려진 듯한”(242면) 기분 속에서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선택을 되돌아보는 목소리도 있다. 정세랑은 이처럼 다양한 여성 인물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효진」의 주인공 ‘효진’은 “어둡게 끈적이는 어떤 것”(66면)으로부터 도망쳐온 인물이다. 효도 효, 다할 진이라는 이름대로 살라고 강요하는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가난해서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열등감 가득한 전 애인으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친다. 예고된 불행에 맞서지 않고 그저 도망치라고 말할 뿐인 효진의 목소리는 지금-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상한 용기를 불어넣는다. 과로로 돌연사한 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으로 친구들과 ‘돌연사맵’을 만드는 이야기 「보늬」와, 한국으로 유학을 온 ‘이스마일’이 과자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과자 귀를 갖게 된 이야기 「해키 쿠키 이어」는 정세랑 작가의 기념비적 스테디셀러인 『피프티 피플』을 떠오르게 한다. 단지 일을 했을 뿐인데 사망한 사람들, 자신이 소속된 조직의 부조리를 고발했다 해고된 사람들, 이들이 불행을 딛고 다음 세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작가는 끊임없이 고민해오고 있었다. 곶감을 먹으면 죽는다는 뱀파이어가 되고 만 여자의 사연을 담은 「영원히 77 사이즈」, ‘은열’이라는 여성 인물을 상상하여 전근대 한일관계사 속에 놓아둔 「알다시피, 은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나라가 화살편지로 인해 오해를 쌓아가는 「이마와 모래」는 작가가 얼마나 다양한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영원을 가진 것처럼 고민 없이 썼던 시기가 그리워집니다” ‘새로 쓴 작가의 말’에서 정세랑 작가는 “이번에 고치며 보니 무척 기괴한 이야기들이라 놀라고 말았”다며 운을 뗀다. “막 글을 쓰기 시작했던 때라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없이 머릿속에서 날뛰는 이미지들을 꺼내 그대로 펼쳤던 듯”하다고. 2010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등단 16년차가 된 만큼 이제는 쓰기 어려워진 이야기들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작품활동 초기부터 발표해온 이 단편들은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젊은 작가만이 향유할 수 있는 반짝거리는 자유로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정세랑만이 쓸 수 있는 어떤 이야기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데뷔 이후 지금까지 보여준 정세랑 소설세계의 씨앗이 『옥상에서 만나요』 안에 담겨 있다. ‘옥상’에서부터 시작된 ‘정세랑 월드’의 탄생을 이제 다시 만나볼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