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우 시인의 시집 『사랑하기 전부터 사랑한 것 아니냐』 는 생의 빙설 위로 퍼붓는 눈을 온전히 다 맞으며 길의 이정표를 찾아 헤매는 시인의 내적 고투를 별다른 언어의 분칠 없이 담백하게 펼쳐 놓고 있는 시집이다. 대부분의 시편들이 순정하지 않은 세계의 순정하지 않음을 탄식하는 이 시집에는 세계의 부정과 불의를 대면하는 인간의 모순된 허위의식을 헤집어 최초의 상태로 표백하고자 하는 시적 의지로 보이는 ‘하얀’, ‘하양’, ‘흰’이라는 어사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띈다. ‘하얀’이 가리키는 지점이 눈더미를 뒤집어쓴 생의 이정표인 양 가로놓여 있기도 하다.
나무들은 각기 하나의 문장/울긋불긋 매달리던 형용사들/찬바람 피해 사전 속으로 돌아갔다/십일월의 문장에는 수식어가 없다//체로(體露)의 존재들, 각기/체로(體露)의 문장 하나
―「적나라(赤裸裸)」 전문
시 「적나라(赤裸裸)」에서의 ‘체로(體露)’는 『벽암록(碧巖錄)』 제27칙의 한 구절인 체로금풍(體露金風); 즉 몸을 벗기는 가을바람에서 비롯되었을 것인 바 이 시는 시 스스로 시공간의 관습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며 생이라는 험로의 준동하는 눈사태 속에서 시의 자리, 사람의 서 있을 자리가 어디인가를 새삼 숙연하게 되돌아보게 한다. 나뭇잎 잎잎들이 다 불려가도록 비명 소리 한 자락 내지 않는 11월의 나무들처럼 자문자답의 혹은 자승자박의 형식으로 생을 향한 질문들을 재배치하고 있는 『사랑하기 전부터 사랑한 것 아니냐』는 혹한의 퍼붓는 눈보라 속 한 그루 나무처럼 기꺼이 눈사람이 되고자 하는 시집이다. 그리하여 『사랑하기 전부터 사랑한 것 아니냐』의 시적 화자들의 절망은 더없이 온당하며 마침내 끼끗하다, 순정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