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창과와 동 대학원 문화연구학과 졸업.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단편 소설 『생시몽 백작의 사생활』이 당선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아내들의 학교』, 장편소설 『미스 플라이트』 『서독 이모』가 있다. 2015년 김준성문학상, 문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8년 『세실, 주희』로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2019년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여성들을 사로잡은 실존적인 두려움을 전하영만큼 농밀하게 표현하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고자 했던 여성이 언제나 돌연 ‘혐오스런 마츠코’의 독방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아마 동시대의 여성이라면 결코 모르지 않을 것이다. (…) 전하영이 참고하는 무수한 레퍼런스는 예술가의 삶이 단단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실존적 메시지다.
“인생 2막은 어쩌면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나를 선택해? 비겁하고 추잡하게…그런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자신을 선택하는 것. 인생은 비록 한때 소돔에서 소금기둥이 된 자신을 보여주지만 언제든 되돌아가 새로운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여전히 불완전한 국가, 무식/무심한 여혐, 가증스러운 소문들 속에서 자기 이름을 찍는 여자를 응원한다. 제인 영, 그녀의 딸과 함께.”
엄마는 애초에 그런 부엌방은 집을 설계할 때부터 피고용인의 거처로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했다. 나는 그 방에 풍경을 떠올렸다. 문을 열면 훅 끼쳐 오던 곰팡내가 제일 먼저 기억났다. 그 방에선 종일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좌상만이 유일한 자기 자리였던 수진 언니는 큰아버지네 가족을 위한 식재료 저장 공간 옆에서 자랐다.
작은 고모와 수진 언니는 오랫동안 부엌방을 썼다. 수진언니는 1층 부엌방에서 2층 큰방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 열심히 투쟁했다. 2층에 방이 2개나 남는데도 할머니는 그들 모녀에게 어떤 방도 내주지 않았다. 1층 부엌방. 내게도 처참한 풍경으로 떠오르듯이 야엘에게도 그럴 것이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아주머니'가 살던 그 방을 생각해 낸 걸 보면. 수진 언니는 등받이도 없는 그 방의 작은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했다. 냉장고 세 대와 나란히 있던 문. 옛날에 아빠는 그 방을 '식모 방'이라고 불렀다.
야엘은 나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왔겠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떠올렸다. 큰아버지의 딸 강장선. 부모는 필요 없고 죽기 전에 어린 시절 헤어진 남동생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다는 그녀. 야엘과 내가 앞으로 다시는 마주할 일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그 당연한 사실이 순간 몹시 슬프게 느껴졌다.
그날 경찰서에서 야엘은 자기에겐 부모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경찰은 돌려 말했지만 나는 야엘의 음성으로 똑똑히 들었다. 부모는 없고 꼬마 소년 -장훈 오빠를 말하는 거 것이었다- 과 아주머니. 할머니와 함께 마당 있는 집에 살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자신과 여동생을 지독하게 학대하고 결국엔 동네 교회 목사의 꼬임에 빠져 외국으로 입양 보내는 일을 주도한 할머니는 언급하면서도 야엘은 끝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야엘 장선
강주현, 강주현, 강주현! 내 이름이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크게 호명되던 순간이었다. 강주현 교수는 애초부터 자질 논란이 일었던 분입니다. 강주영 교수는 박사 학위가 없으신 분으로서 박사 학위를 가진 서정수 교수보다 더 수업을 잘하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입이신 강주현 교수의 자질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재직하고 계신 교수님들의 심기가 불편하실까 봐 걱정됩니다.
그저 그녀는 지독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발설하는게 재밌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걸 나는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하지만 언니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언니가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닌 거예요. 그냥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설거지를 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나는 큰고모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남편에게 그녀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고 놀란 적이 있었다. 행주는 이렇게 꿍쳐 놓는 게 아니야. 접시 바깥도 닦아야지 안만 닦아? 아직도 기름때가 묻은 그릇을 닦거나 행주를 삶을 때면 큰고모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예리라면 절대 이렇게 두진 않을 거다. 집요하게 예리와 나를 비교하면서 꾸짖던 순간들이.
"네 엄마가 너는 자기 머리를 닮아서 공부는 제법 한다고 그러더라. 국어를 잘한다면서? 그런데 그거 아니? 예리도 국어 같은 건 잘한단다. 수학이나 영어를 잘해야지."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서러워져서 눈물이 났다. 공부를 잘한다고 잘난 척한 적도 없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억울했다. 큰고모는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며 나를 타박했다. 예리라면 집안을 이꼴로 만들어 놓진 않을 거라고 하면서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게집이라면 살림도 배워야 한다면서 구시렁댔다.
예리 남편이 내 소설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나는 당황했다. 예리 남편은 <백년해로>로 독서 클럽 회원들과 스터디를 하려고 준비하다가 그 이야기가 다름 아닌 자기 처가의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다. 예리가 재혼 가정의 자녀라는 것도 큰아버지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해외로 입양 보냈다는 것도 그전에는 몰랐으나 그는 능소화 핀 후암동 옛집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작은 아버지네 가족이 잠시 얹혀 살았다는 이야기도. 아빠는 그 사람이 한 말을 내게 전부 전해 줬다.
여름이면 능소화가 담벼락에 너울대는 후암동 적산가옥 고택. 내가 잠깐 살았고 떠나온 뒤에도 내내 무서워했던 그 집.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큰아버지에게 버려진 두 딸에 관한 이야기. 그 중 중년이 된 언니 한 명이 한국에 찾아와 동생만 만나고 싶다고 했던 이야기였다. 전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막 등단했을 때 "우리 가문에 드디어 황석영 같은 작가가 나오는 것이냐"며 좋아했다던 큰아버지는 내가 그런 소설을 썼다는 걸 알고 아빠에게 왜 자식을 왜 그렇게 키웠느냐고 말했다. 아빠는 오랫동안 큰아버지가 어떤 모욕적인 말을 해도 참아왔지만 그 말에만큼은 참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자식이 소설로 좀 쓰겠다는데 뭐가 그리 문제요, 하고. 그게 그렇게 남부끄러운 일이면 애초에 왜 자식들을 버렸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