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최정희가 『인간사』에서 시도한 것은 자기 인생의 결산이자 한국 현대사의 결산이다.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이 결산의 과정에 작가가 이귀례-임화 모델을 차용했다는 점이며, 이 모델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실존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지하련이 아니라 이귀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사라진 ‘지하련’이 아니라 남은 ‘이귀례’를 통해서밖에는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대한민국의 환부(患部)와 치부(恥部)를 작가 최정희는 장편소설 『인간사』에서 조명한다. (중략)
『인간사』는 남과 북이 고르게 저지른 국가폭력과 동족 간의 살상을 아프게 환기한다. 대한민국은 ‘동경 시절’의 청춘들이 꿈꾸었던 이상과는 거리가 먼, 그 시절의 잔해로 존재할 따름이라는 가혹한 진단이 여기에 수반된다. 최정희의 『인간사』를, 남과 북을 고르게 비판한 최인훈의 『광장』이나, “알맹이는 이북으로 가고 남은 것은 쭉정이뿐”이라 외친 김수영의 산문과 더불어 가장 1960년대적인 텍스트의 하나로 새로이 문학사에 기입하는 작업은, 바로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