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선 시인의 이 시집에서 이룬 시적 성취는 자연 의인화의 사용 방식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그는 자연을 인간 감정의 단순 비유로 소비하지 않는다. 갈대, 소나무, 폭설, 단풍잎, 우체통, 새벽종은 각자의 물성을 지닌 채 발화한다. 시인은 그 발화를 듣고 받아 적는다. 이때 인간은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난다. 신유물론적 관점으로 말하면, 인간은 유일한 행위자가 아니라 다종적 행위자들 사이의 한 접점이다. 이 접점에서 감정이 생기고 의미가 만들어진다. 이 시집에서 삶의 지혜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교훈이 인간의 머리에서 추론된 명제를 넘어서서 인간과 비인간의 접촉에서 길어 올린 체험적 문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