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나누어지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수, 여기 그것을 0으로 셈하는 시인이 있다. 전형철은 이 불가능한 계산에 ‘슬픔의 수리학(數理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이 명명 앞에서 오래 멈춘다. 답이 없는 줄 알면서도 셈을 그치지 않는 사람의 필적이 시집 갈피마다 별처럼 박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숫자에 영을 곱하면/0이 되”는 소멸의 산술 앞에서, 그래도 그가 “아프지 말자/아프지 말자” 두 번 겹쳐 적을 때, 이 셈은 얼마나 절실한가(「별내」). “눈물의 모든 이름을 아는 사람”으로서 시인은 무릎걸음으로 눈 내린 절벽 끝에 서거나(「예티」), “두 별 사이에/어금니를 깨물 듯” 기댄다(「북벽」). 답이 오지 않는 밤을 무릎과 어금니로 견디며 밑바닥까지 셈한 슬픔은, 더는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다. 슬픔의 수리(數理)는 어느새 수리(水理)가 되어 다 풀지 못한 셈은 넘치고, 넘친 슬픔은 다른 생으로 번져 간다.
그리하여 시인은 제 울음마저 아껴 남의 울음에 목을 빌려준다. “먼저 간 자의 울음을 대신 우는 것처럼//갈라진 솥을 지고 느리게 걸어”가는 사람(「둔차」), 「곡비」의 가난한 비와 「완신」의 쉰 목소리로 땅을 긁는 무당이 모두 그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육친은 죽고 아이들은 자란다. “늦고 적고 다른 길을 가는 흰 국수 같은 아빠”는(「코코」) “이 바람을 다 타고 넘어야지요”라고(「하원」) 아이에게 타이른다. 존재가 0으로 지워지는 것을 지켜본 사람만이 곁에 남은 목숨이 얼마나 뜨거운 수인지 알기에, 떠난 이를 세던 손으로 그는 아이들의 “두고두고 돌아볼 퇴로가”(「코코」) 되어 주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죽어 본 적 없고 누구도 어떤 별에 닿아 본 적 없지만, 그 유이(唯二)한 저편을 향해 전형철은 “말이 아니면 침략할 수 없는 저 세계로, 모든 것을 거슬러” 걸어간다(「슬픔의 수리학」). “나는 지금/사라질 준비가 되었다”라고 그가 적을 때, 우리는 안다(「둔차」). 이것은 소멸이 아니라 부재하는 것들의 슬픔까지 모두 세어 보고자 하는 도저한 의지라는 것을. 이 시집이 오래도록 우리를 대신해 걸어갈 것을 믿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