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전부’인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다(「아무것도 없는 사람」). 김문자 시인은 그 오래된 진실을 다시금 우리 앞에 부려 놓는다. 그녀는 사랑의 순간들을 결코 단순한 감정의 파편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대신 삶의 기척, 날마다 다가오는 작은 빛과 그림자의 흔적 속에서 “둥글게 굴러가는 회전문” 같은 사랑의 근원을 찾아내고, 그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인다(「자전거를 타고 화성으로」).
“침착하게 얼굴을 덮”는 빗소리와 삶의 무늬를 비추는 유리창처럼 시인은 꾸밈을 덜어 낸 채 정직하게 다가온다(「쏟아지는 기분」). 흔들리는 마음의 결, 지나간 계절의 냄새, 불현듯 찾아오는 정념은 시인의 시편마다 가만히 배어 있다. 때문에 우리는 “소리의 눈이 멀리 퍼지고 있다면 당신이 보았던 기억은 풍경”이라는 시인의 곁에 오래 머물 수밖에 없다(「깊어서 그래요」). 그리고 어느새 ‘나’의 기억이 겹쳐지고, 잊은 줄 알았던 감정들은 되살아난다.
이 시집은 사랑을 말하면서도 하나의 사랑만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상처에 대한 이해, 모세계에 대한 신뢰와 의심, 불화까지 포월한다. 어쩌면 성속(聖俗)의 중개자로서 시인은 가이아(Gaia)처럼, 설문대할망처럼 사랑이라는 중력을 넘어 언어의 “물길”을 따라 한생을 항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물의 방향」).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사랑한다]는 그렇게 “달의 범람으로 하늘의 문이 열”린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위무의 기록이며(「달로 가는 나무」), “불의 혀가 되어 나를 달구”는 불완전하지만 진실한 인간 존재에게 보내는 비밀스런 고백이다(「처음보다 끝이 아름다운」). 이제 우리는 꿈이 많은 아이가 ‘최초의 나를 만나 바다 우물 속 달을 건질’ 물때를 함께 기다릴 일이다(「바다 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