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006 연표
010 클림트 시대의 빈 016 혁명과 링슈트라세 022 클림트의 탄생 026 클림트의 성격과 사생활 040 클림트 양식의 기원 048 빈 분리파 062 베르 사크룸 066 추문 076 장식미술 086 빈의 유대인 092 클림트의 후원자와 수집가 106 초상화 118 풍경화 128 알레고리와 상징 144 클림트, 프로이트, 성 154 클림트, 말러, 음악 164 드로잉 172 한 시대의 종말 176 주석 177 참고문헌 177 도판 출처 178 찾아보기 182 감사의 말 |
Patrick Bade
패트릭 베이드의 다른 상품
엄미정의 다른 상품
|
구스타프 클림트 예술의 매력은 고혹적으로 아름다운 작품뿐만 아니라 1900년대 빈과의 연광성에서도 비롯된다. 클림트 시대의 빈은 지크문트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 아르투르 슈니츨러, 카를 크라우스, 아르놀트 쇤베르크, 테오도르 헤르츨 그리고 처년 아돌프 히틀러의 빈이기도 하다. 파리가 서구의 문화 수도라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돌이켜보면 빈이 20세기의 최상과 최악으로 꼽히는 거의 대부분의 문화를 배태한 발상지였다는 것을 우리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 「클림트 시대의 빈」 중에서 링슈트라세 조성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862년 7월 14일, 구스타프 클림트는 빈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머지않아 빈 시로 편집되는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미천한 금속공예 장인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의상을 차려 입은 에른스트 클림트를 프란스 할스의 화풍으로 그린 초상화를 보면 표정이 다소 호전적인데, 분명 그는 걸핏하면 화를 내는 다혈질이었다. 이와 달리 에른스트의 아내 안나는 천성이 명랑했지만 심약했다. (?) 안나는 노래 부리기와 오페라 관람을 즐겼는데, 구스타프 클림트가 음악을 사랑했던 것은 아마 어머니를 닮아서일 것이다. --- 「클림트의 탄생」 중에서 클림트의 작품처럼 널찍한 전시 공간 저쪽에서도 십게 알아볼 수 있는 화가의 작품은 손에 꼽는다. 또한 클림트처럼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 폭넓고 노골적으로 도용한 화가도 손에 꼽을 것이다. 클림트의 원숙한 스타일에서는 특별히 한스 마카르트, 라파엘전파,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예술지상주의, 페르낭 크노프의 상징주의, 클로드 모네의 인상주의, 빈센트 반 고흐의 표현주의, 페르디난트 호들러와 프란츠 폰 슈투크의 양식화된 그림 (?) 일본 목판화 같은 다양한 요소가 망라되며 어우어진 축제의 장식과도 같다. --- 「클림트 양식의 기원」 중에서 1918년 1월 11일에 클림트는 쉰다섯 나이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가까스로 입을 뗀 그의 첫 마디는‘에밀리를 불러줘’였다. 에밀리 플뢰게가 그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려주는 한 마디였다. (?) 클림트는 당시 전 유럽에서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에 걸렸고 결국 쓰러진 그 해 2월 6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한때 광대한 다인종 제국의 자부심 너미는 수도였던 비는 베르사유 조약의 여파로 육지에 둘러싸인 독일어권 소국의 수도로 축소되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은 이 도시를 떠나 대부분 베를린으로 갔다. 클림트의 빈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 「한 시대의 종말」 중에서 |
|
세기말 빈, 에로티시즘으로 물들인 황금빛 화가
클림트의 시대 빈의 링슈트라세는 오스만의 파리 도시계획과 더불어 19세기 도시 근대화의 성공적인 모델로 꼽힌다. 런던, 파리, 베를린에 이어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수도였으며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융합되어 ‘코스모폴리탄’의 도시가 된 이곳, 빈에서 1862년 구스타프 클림트가 태어난다. 아버지는 미천한 금속공예가였고 그를 따라 장인이 되고자 했던 구스타프 클림트는 응용미술학교에 들어간다. 빈은 그에게 거대한 아틀리에와도 같았다. 링슈트라세, 펠트뮐가세, 요제프슈태터슈트라세 등 거리를 따라 스튜디오를 옮겼고, 그곳에서 그는 동시대의 예술가들과 함께 후원자와 여인들을 만났다. 클림트의 양식 ‘알레고리’, ‘장식미술’: ‘학부 회화 3부작’ 〈철학〉, 〈약학〉, 〈법학〉과 〈키스〉, 〈물뱀〉, 〈유디트〉 등 ‘황금빛 화가’ 클림트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알레고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가 남긴 작품 다수는 초상화와 풍경화이지만 스스로를 초상화가, 풍경화가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범위하게 미술사조에서 그의 작품을 설명하자면, 뭉크, 뭉크, 페르디난트, 슈투크, 크노프와 같은 상징주의에 더 가깝다. 문학과 시각예술에서 상징주의가 진보하던 때는 클림트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치던 19세기 중엽이었다. 클림트는 전설, 신화, 꿈 등 눈에 보이지 않은 철학적 개념과 관념 등을 형상화하고, 자신만의 표현방식으로 알레고리 즉 우의화로 남긴다. 클림트의 초상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매다 프리마베시〉,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 등 클림트가 그린 초상화 속 인물은 대부분 그의 후원자와 수집가들이다. 당시 빈은 파리와 베를린과 같이 미술시장의 발전이 더뎠기 때문에 전업 화가인 그가 의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그리는 것이었고, 그들의 저택 벽화를 꾸미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빈 대학교 벽화 ‘학부 회화 3부작’으로 큰 추문을 겪은 그는 더는 ‘공공미술’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흥 부르주아지이던 둠바 가문, 블로흐-바우어 가문, 카를 비트겐슈타인이 클림트의 후원자였고, 그중 ‘소냐 크닙스’가 유일한 ‘귀족’ 고객이었다. 클림트의 초상화는 유겐트슈틸(아르누보)로 장식적이며, 어딘지 모르게 에로틱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또 장식으로 사용된 배경 무늬는 중국, 일본풍의 영향을 받아 패턴화한 것들로 보인다. 클림트의 풍경화: 〈아터 호수〉 〈카머 성 공원의 오솔길〉 〈고요한 연못〉 등 클림트에게 도시 빈 이외에도 ‘아터 호수’는 의미가 있는 곳이다. 풍경화를 꾸준히 그리던 클림트는, 아터 호수로 매년 여름 에밀리와 함께 떠나 휴가를 보냈다. 빈 사람들이 잘 모르는 호숫가를 풍경화로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풍경화는 구체적으로 장소를 묘사하기보다, 특유의 분위기를 나타냈다. 1900년대 이후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색채가 환해졌고, 짧은 붓 자국으로 반짝이는 물의 표면을 표현하는 것은 모네를 연구했음을 보여준다. 클림트와 도시 빈의 황금기 이 책은 도시 빈의 역사와 빈의 거리 링슈트라세에 대해 깊이 있게 설명하는데 세기말 빈을 이해하는 것은 곧 클림트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시 건설로 변화된 도시 풍경 그리고 그 시대에 황금기를 보낸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서 클림트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빈 분리파의 핵심원이었고, 잡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을 발행하며, 해외 각국의 미술을 포용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던 예술가 중 하나였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을 외치던 빈 분리파 그리고 클림트는 모방이 아닌 창조를 원했다. 이 책의 핵심은 클림트가 과거의 미술에서, 해외의 미술에서 어떤 점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자신만의 작품 세계로 어떻게 표현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