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5
- 일러두기 12 - 서 문 13 제1장 조선고 21 산군총고 27 낙랑고 30 현도고 41 임둔고 56 진번고 59 낙랑별고 62 대방고 78 제2장 삼한총고 93 마한고 98 진한고 109 변진고 116 변진별고 127 임나고 146 제3장 졸본고 155 국내고 163 환도고 안시부 170 위례고 178 한성고 187 제4장 옥저고 201 예맥고 211 예맥별고 221 말갈고 231 제5장 발해고 243 발해속고 279 발해세가 311 제6장 북로연혁고 321 제7장 서북로연혁고 377 부구연성고 428 제8장 패수변 433 백산보 443 제9장 백두산정계비고 457 발문 479 |
다산茶山
정약용의 다른 상품
李民樹
이민수의 다른 상품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우리나라는 멀리 단군(檀君)·기자(箕子) 이래로 부여(扶餘)·옥저(沃沮)와 예맥(濊貊)·숙신(肅愼) 등이 있고, 말갈(靺鞨)·고구려·발해(渤海)가 서로 쪼개어 점령하기도 하고 혹은 탄병(呑倂)하기도 하며, 수천 년 사이에 싸움과 침공이 계속되면서 국경이 바뀌어 경계를 상고하여 지정하기가 어려웠다. 그 위에 문헌(文獻)에 증거가 없고, 기자 이후로 한때 문자가 갖추어지지 못해서 더구나 사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 까닭에 자연히 사실이 어긋나고 탈락되어 그저 억측으로 판단하고 잘못된 학설이 전해졌다. 이리하여 심하게는 압록강을 패강(浿江)이라 했고, 혹은 고구려와 발해를 모두 변한(弁韓)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숭양산인(嵩陽山人) 장지연(張志淵)은 다산(多散) 정약용(丁若鏞)이 쓴 『강역고(疆域考)』를 참고로 하여 제가(諸家)의 말을 절충해서 전후 수천 년 사이의 의심스럽고 현혹스러웠던 것을 바로잡은 것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임나고(任那考)와 백두산정계비고(白頭山定界碑考)를 보충했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삼한고(三韓考)·졸본고(卒本考)·옥저고(沃沮考)·발해고(渤海考)·북로연혁고(北路沿革考)·서북로연혁고(西北路沿革考)·패수고(浿水考) 등이 수록되어 있어 한국의 지리에 관심 있는 분에게는 필독서라 아니할 수 없다. 장지연은 고종 1년(1864)에 나서 1921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근세사의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초명은 지윤(志尹), 자는 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 또는 숭양산인이다. 본관은 인동(仁同), 상주(尙州) 출신으로 장석봉(張錫鳳)의 문인. 고종 31년(1894)에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을미사변(乙未事變)에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발송했고, 1897년 아관파천 때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했다. 이 해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대한례전』 편찬에 참여, 이듬해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이승만·남궁억·양흥묵과 만민공동회를 열어 총무위원으로서 정부의 실정을 규탄했다. 1899년 시사총보사의 주필로 언론계에 투신, 이어 황성신문사의 주필로 항일구국(抗日救國)의 필봉(筆鋒)을 휘둘렀다. 한때 사직하고 광문사(廣文社)를 설립,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901년에 황성신문사 사장직을 맡아 민중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전력을 다했다. 1905년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유명한 사설을 써서 일제의 흉계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전 국민에게 알렸다. 이로 인해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정부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은퇴하여 역대 문헌의 수집과 저술에 힘썼다. 1906년 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벌이다가, 이듬해 대한자강회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개편했으나 압력이 심하여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해조신문 주필이 되었다. 경영난으로 폐간된 후 상해(上海)·남경(南京) 등지로 방랑하다가 귀국하여 1909년에 진주(晉州) 『경남일보』의 주필이 되었고, 이듬해 8월 29일에 한일합방이 되던 날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했다가 이로 인해서 [경남일보]가 폐간되었다. 이로부터 실의에 빠져 폭음으로 소일하면서 서울·마산을 왕래하다가 마산 수정에서 죽었다. 그는 이 강역고(疆域考) 이외에 농정전서(農政全書)·일사유사(逸士遺事)·위암문고(韋庵文稿)와 그 밖의 많은 저서가 있다. 그는 한평생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싸우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여기에서 잠시 저자의 말을 빌린다. 우리나라는 동양의 한 모퉁이에 있다. 북쪽으로 호맥(胡貊)과 인접되었고, 서쪽으로 요연(遼燕)을 잡아당기고 있어서 옛날부터 국경의 나뉨이 일정하지 않아 경계의 땅에 침입하여 싸우는 일이 그치지 않았다. 세력이 강하면 나가서 요계(遼?)를 점령하여 이맥(夷貊)을 호령했고, 세력이 쇠잔하면 물러가서 반쪽을 지키니 자연 강토(疆土)가 찢어졌다. 이에 부여·예맥·발해·말갈이 기회를 엿보아 나누어 버티고 각각 점령해서 우리나라 전체가 사분오열의 혼란기를 맞았다. 요(遼)·금(金)·몽고(蒙古) 이래로 기자와 고구려의 옛 나라를 다시 판도에 넣을 수가 없어서, 심지어 성조(聖祖)의 능침(陵寢)의 발상(發祥)한 땅이 이역(異域)으로 밀려나게 했으니 어찌 지사들의 끝없는 한이 되지 않으랴? 아아! 강역을 상고하는 것은 비록 세교(世敎)에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 한 권의 책은 비단 지지(地志)로써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일부 동방의 일사(逸史)로서 그 한 번 펴고 한 번 움츠리는 것에 세도(世道)의 융성하고 쇠퇴하는 것이 매어 있는 것이다. 아아! 이제 국경에 일이 많고 강한 이웃 나라가 둘러 엿보는 날을 당해서 뜻이 있고 나라를 사랑하는 선비라면 마땅히 이 책에 대하여 무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자는 바라건대 이것을 헤아려서 더욱 강구하여 그 부족한 것에 도움을 주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민족의 역사를 바로 알고 조국 강역의 연혁에 올바른 이해를 위한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 옮긴이 |